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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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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대중이 거리로 나서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장면은 역사책이나 뮤지컬 무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지만 외신의 헤드라인에 이 같은 장면이 다시 등장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는 ‘굶주림이 어떻게 정권을 무너뜨리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의 분석을 인용해 “최소 33개국이 곡물가 인상으로 사회적 불안정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곡물폭동의 사회학=부패하고 억압적인 정권 아래서도 아이들만 먹일 수 있으면 체제에 순응하던 서민들도 이런 조건부 안정이 깨지는 순간 약탈자나 민병대로 돌변한다. 곡물가 인플레이션을 맞이한 오늘날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조셋 시란 씨는 “선반 위에 식량이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돈 없는 사람들이 이를 사지 못하는 게 지금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식료품 가격 급등으로 유혈 폭동이 일어나 최소 8명이 숨진 아이티는 이런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4년에도 같은 이유로 폭동이 일어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이 축출됐던 아이티 정부와 의회는 재빨리 사태 확산 차단에 나섰다. 아이티 상원은 12일 자크에두아르 알렉시 총리의 해임안을 가결했다.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쌀 가격 인하 안정대책을 발표했다.
이집트 정부도 정부 보조금에 불구하고 빵 값이 치솟으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모잠비크, 우즈베키스탄, 예멘, 인도네시아 등도 최근 곡물 가격이 오르면서 폭동과 시위 사태를 맞이했다. 모두 지난 3년간 세계 평균 80% 오른 곡물가격 때문이었다.
▽“세계화의 반작용” 분석=한편으로 세계화 추세가 곡물가 폭등에 일조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로 지적된다.
타임지는 희소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전 세계 국가들의 과잉 경쟁이 오늘날의 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 20년간 중국과 인도는 산업화로 중산층이 급성장해 사회적 환경이 급변했다. 석유가격이 오르면서 농업생산비가 올랐고, 식량을 생산하던 밭이 바이오에너지를 생산하는 경지로 대체됐다. 새로운 중산층의 증가는 식품 수요 확대로 이어졌고, 호주의 가뭄 등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곡물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음이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문제 해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농업국은 지난해 세계적으로 쌀 생산량이 전년도보다 0.7% 늘었지만 쌀 소비는 이보다 많은 0.9%(4억2400만 t) 늘었다고 밝혔다. 도시화의 확산으로 쌀 생산 기반이 사라져 수급 상황이 개선될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
타임지는 식량위기 및 이에 수반되는 정치적 부담은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의 작용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식량안보 위기에 처한 필리핀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한 것도 이런 움직임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마르 로하스 필리핀 상원의원은 “정상들이 모여 식량위기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현지 ABS-CBN 방송이 13일 보도했다.
로버트 지글러 국제쌀연구소 사무국장은 “아프리카가 아시아의 잉여 곡물로 생존하고 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우려했다. 쌀 외에는 다른 대체재를 찾기 어려운 아시아 국가에서 쌀 공급을 줄이자 전 세계가 기아의 그늘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쌀 공급사슬 붕괴 우려=그러나 오늘날 정부의 개입은 생각지 못했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인도는 경제개혁을 통해 지난 15년간 곡물거래에 대한 정부의 통제조치를 대부분 철폐했지만 그 후 세계시장의 변화에 노출됐다. 인도의 쌀 생산 및 교역업자는 최고가로 입찰하는 해외 바이어에게 쌀을 판매한다. 그러다 보니 인도 국내에 쌀 공급 부족이 발생하고 이는 곡물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결국 정부가 국내 쌀시장 안정을 위해 수출 제한조치를 취하자 생산자와 교역업자들이 국제시세보다 낮은 가격을 피하기 위해 사재기에 나서면서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이 되풀이되는 형국이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