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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1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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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낙태 이라크전쟁 등 이견 수렴 힘들어
“시대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산물” 지적 일어
“‘나는 공화당원’이라고 하면 그걸로 서로가 통했던 그런 시절이 그립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시대에는 모두가 한 깃발 아래 있었죠.”
미국 레이건 행정부 시절 연방정부에서 국가안보 정책 자문역이었던 조지타운대의 한 교수가 14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지만 정작 공화당 핵심 지지자들은 뜨악한 표정을 짓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다 나온 푸념이다.
그는 “지금은 대부분 중도 사퇴했지만 지난달 초까지의 공화당 후보들 면면을 보면 보수주의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보수주의는 △자유무역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강력한 안보 △작은 정부 △전통적 가치관 존중 등 핵심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의 보수파는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버렸다. 지난해 가을 대선전이 본격화하면서 동성애 결혼 인정 반대, 낙태 반대 등을 중시하는 ‘사회적 보수파’는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프레드 톰슨 전 상원의원 주변으로 모였다.
강력한 안보와 애국주의, 이라크전쟁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케인 의원을 밀었고 테러와의 전쟁, 국토안보를 중시하는 ‘안보 보수파’는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적극 지지했다.
또 감세와 작은 정부를 중시하는 ‘경제적 보수파’는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밀었다.
물론 당내 경선 때 각 후보의 특장을 찾아 지지세가 나누어졌다가 후보가 결정되면 다시 합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공화당의 상황은 다르다.
밀던 후보가 사퇴한 뒤에도 지지자들은 상대 진영을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인정하길 꺼린다. 특히 사회적 보수파는 매케인 의원, 줄리아니 전 시장 등을 ‘민주당원보다도 못한 이단자’로 여기는 분위기다.
공화당 원로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최근 “공화당은 지난 30년간 놀랄 만한 단합의 시대를 지내 왔지만 이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며 “차기 공화당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레이건의 후예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론 각자 레이건의 조각만을 붙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롬니 전 주지사는 14일 매케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나는 내 견해가 있고, 매케인도 그의 의견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가 됐다”며 당의 단합을 호소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한 간부는 “핵심 보수파 사이에선 불법 이민자 구제, 감세 반대, 정치자금 개혁 등 여러 정책에서 비(非)공화당적 태도를 보여 온 매케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보수주의의 가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히 강하다”고 말했다.
그는 “공화당 핵심 지지자들이 매케인 후보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조지 부시 행정부 때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처음엔 세금을 안 올리겠다고 약속했다가 이를 뒤집었고, 진보적 인사를 대법원 판사에 임명해 보수파에 큰 실망을 줬다.
근세기 들어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과 부통령 모두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상황도 공화당의 앞날을 둘러싼 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7년 동안 이라크전쟁과 네오콘(신보수주의) 실험의 실패로 보수주의의 기반 자체가 취약해진 상태에서 재건의 구심점이 될 리더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 같은 보수파의 분열은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조지워싱턴대 박윤식 교수는 “이민자가 많아지고 낙태 동성애 등 과거에는 잠잠하던 각종 이슈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공화당 내부에서도 이슈별, 쟁점별로 다양한 의견의 분화가 생겼다”며 “과거의 단일한 보수주의 깃발만으로는 다 끌어안을 수 없게 됐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정치, 경제 이슈에선 정통 보수파이면서 사회적 가치에선 중도파인 사람이 늘어나는 등 다양성이 커진 상황에서 중도파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게 공화당의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사회적 이슈를 중심으로 진행돼 온 이 같은 보수파의 다변화는 한국에서 지난해 말 대선 때 남북관계를 놓고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에 반발하는 강경 보수층이 이회창 후보 주변으로 모여든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풀이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