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속 피랍일지’… 서명화씨 ‘악몽의 42일’ 기록

  • 동아일보
  • 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무언가를 기록할 수첩은 모두 압수당했다. 탈레반은 쉬지 않고 감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절박함 속에서 찾아낸 것은 흰색 바지 안쪽.

인질 중 한 명이었던 서명화(29·여) 씨가 자신이 입었던 바지 안쪽에 기록한 ‘피랍일지’를 31일 기자회견에서 공개했다.

서 씨가 회견장에 들고 들어온 흰색 바지를 펼쳐 뒤집자 파란색 볼펜으로 깨알같이 적은 글씨가 드러났다. 짧고 간결하게 축약된 문구들 속에는 42일간의 억류생활(서 씨는 29일 석방)과 몸 상태, 이동경로 등이 낱낱이 담겨 있었다.

42일간 인질생활을 했던 서명화 씨가 3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피랍일지. 탈레반의 눈을 피해 흰 바지 안쪽에 몰래 적은 내용들이다. 카불=사진 공동취재단
42일간 인질생활을 했던 서명화 씨가 31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피랍일지. 탈레반의 눈을 피해 흰 바지 안쪽에 몰래 적은 내용들이다. 카불=사진 공동취재단

서 씨는 ‘8월 15일 아마드 집으로 이동, 17일 몸살 배탈, 18일 주스로 만든 죽 먹음, 21일 머리 감음’ 등을 시간 순으로 꼼꼼히 적었다. ‘감기 몸살(기침 심함)’이나 ‘몸살 배탈’, ‘토굴탐험 시작’ 등 초기의 악화된 건강상태나 억류된 장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베드로 같은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이나 시편, 요한복음, 고린도후서, 기도회 같은 단어들도 적혀 있어 그가 신앙의 힘에 의지해 42일을 버텼음을 보여 주었다. 기록 속에는 먹고 싶은 음식이나 기도제목 등도 보였다.

서 씨는 “일행이 처음엔 일기를 썼는데 탈레반이 수시로 수색해 (수첩이나 노트 같은 종이류를) 압수해 갔다”며 “감시를 피해 바짓단을 걷어 7월 24일부터 (피랍일지를) 썼고 그 이전은 기억을 되살려 간단히 기록했다”고 말했다.

서 씨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 나가면 가족들이 궁금해할 것 같고, 나중에는 다 잊어버릴 것 같아 이동 장소, 주요 사건, 생각 같은 것들을 적었다”고 설명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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