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 할양(상)

  • 입력 2007년 8월 24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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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景福宮 서울에 있는 경복궁. 1984년, 이곳에 일본군이 난입해서 전투를 벌인 끝에 점령하였고, 후에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흥례문으로, 동서남북 4군데에 있는 대문의 안쪽에 있다. 15세기 당시에 궁전의 수비를 담당했던 병사들의 의상과 무기가 관광용으로 재현되어 있다= 사진 후쿠다(福田)
경복궁 景福宮 
서울에 있는 경복궁. 1984년, 이곳에 일본군이 난입해서 전투를 벌인 끝에 점령하였고, 후에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흥례문으로, 동서남북 4군데에 있는 대문의 안쪽에 있다. 15세기 당시에 궁전의 수비를 담당했던 병사들의 의상과 무기가 관광용으로 재현되어 있다= 사진 후쿠다(福田)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1844∼97년)  메이지(明治)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기슈번(지금의 와카야마현(和歌山縣))출신으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해원대(海援隊)에 참가하여 행동을 함께 했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에 힘을 쏟는 한편, 청일 전쟁을 외무장관으로서 주도하였다. 뛰어난 수완을 평가하여 지금도 외무성에는 동상이 서 있지만, 청일 전쟁 때 학살 사건이 있었던 중국의 여순 기념관에는 악인으로 초상화가 걸려 있다.(사진은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제공)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1844∼97년)
메이지(明治)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기슈번(지금의 와카야마현(和歌山縣))출신으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해원대(海援隊)에 참가하여 행동을 함께 했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에 힘을 쏟는 한편, 청일 전쟁을 외무장관으로서 주도하였다. 뛰어난 수완을 평가하여 지금도 외무성에는 동상이 서 있지만, 청일 전쟁 때 학살 사건이 있었던 중국의 여순 기념관에는 악인으로 초상화가 걸려 있다.(사진은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제공)
청일 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되었다

《아편 전쟁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의 잇따른 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메이지(明治) 시기의 일본은 근대화를 서둘렀다. 제 2장은 이러한 일본이 스스로 아시아를 침식하고, 열강으로 변모하게 된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을 주제로 한다. 일본인은 잊어버리기 쉽지만, 이 전쟁은 한반도(朝鮮半島)를 무대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청나라 군만이 아니라 조선 민중도 적으로 돌렸다.》

이쪽에서 먼저 화제로 삼은 일도 있고, 상대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은 같은 말이었다.

―― 어째서이지요.

청일 전쟁의 흔적을 찾아, 나는 한국과 중국을 돌아 다녔다. 거기에서 만난 정치가와 학자가 고개를 갸우뚱 했던 것은, 청일 전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가 하원 위원회에서 막 가결되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광의인가 협의인가’로 나눈 점,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에게 `사죄의 뜻을 표한 것, 여, 야당 국회의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미국 신문에 반론 광고를 낸 것. 특히 광고에 관해서는 “상식을 넘어 섰다”라고 한국의 강창일(姜昌一) 의원은 말했다. 울분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에 가깝다.

단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이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좋게 비춰 질 리가 만무하다. 강 의원은 원래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 대한 저작도 가지고 있는 학자 출신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은 아직도 ‘100년의 불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정확하게는 종결된 지 112년이 지난 청일 전쟁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정면충돌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청일 전쟁은 한국인들에 있어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먼저, 전장은 한반도(朝鮮半島)였다.

▼청일 전쟁

1894∼95년, 중국(당시 청나라)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일본 측은 1만3000여명의 전사자 및 병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전쟁 비용은 약 18억 원이었다. 중국 측은 미상이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왜 조선의 지배권에 집착하였는가? 그것은 1890년, 제1회 제국 의회에서 행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수상의 시정 방침 연설에서 알 수 있다. 야마가타(山縣)는 ‘이익선(利益線)’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경이라는 ‘주권선’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이익선’까지 수비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이익선이 조선이었다. 배경으로는 시베리아 철도 착공을 목전에 둔 러시아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6년의 한일 수호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기치로 내걸어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게 하려는 한편, 시장으로서도 중요한 조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였다. 조선 내부에서도 청•일과 연결된 각각의 세력이 다툼을 벌였으며, 1884년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 등이 일으킨 쿠데타를 청나라 군이 진압하였다. 조선을 사이에 둔 줄다리기는, 청일 전쟁이라는 정면충돌에 이르게 된다.

조선 왕궁을 점령 / 청나라 군 축출 작전

한류는 이미 붐이 아니라, 지금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일본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주말에 서울로 여행가는 것도 보통이 되었다.

그 서울에 경복궁이라는 왕궁이 있다. 관광 명소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전쟁은, 사실상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7월 23일 미명. 어둠속에서, 한 무리의 일본군이 경복궁의 문 하나를 폭약으로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잘 되지 않자, 기어오르고, 도끼로 부수는 등, 갖은 방법 끝에 난입에 성공하였다. 다른 문도 활짝 열고 왕궁을 지키는 조선 병들과의 약 3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왕궁을 제압한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마치 활극 영화와 같았던 전투였는데, 일본군의 공식 전사에는 기록이 없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소한 전투였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후쿠시마(福島) 현립 도서관에서 상세한 전사 초안을 찾아내어, 100년 후의 세상에 진상을 알리고자 한 사람이 나라(奈良) 여자대학의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명예교수였다.

왜 왕궁을 점령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위정자를 바꾸어, 일본에게 청나라 군을 조선에서 축출해 달라는 요청을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도 난폭한 수법이라고 지금은 생각되지만, 당시는 그런 난폭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일본은 더욱 난폭해 져서 1945년 파국에 이르게 되지만. 우선은 이 전쟁이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 쌍방의 군대가 있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봄, 조선 남부에서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 중심의 동학(키워드 참조)교도 들이 봉기한 일이다. 온갖 착취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현재는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 불린다. 대처 능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종주국인 청나라에 출병을 부탁했는데, 그 와중에 일본도 멋대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동학 농민군은 청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보고 조선 정부와 원만한 협상을 벌여, 일단은 소동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군 의사가 없었다.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일본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2일 후 인천 근처의 풍도(豊島) 연안에서 청나라와의 교전에 돌입했다. 일본은 어찌하였던 간에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다. 정부 내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이었다.

왕궁 점령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은 전장으로 변했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과 싸우면서 쾌조의 진격을 하는 한편, 동학 농민군을 섬멸시켜 버린다. 왕궁 점령을 계기로, 농민군은 타도 상대를 ‘부패한 조선 정부’에서 ‘일본 침략군’으로 변경하고, 재봉기 하기에 이르렀다.

민중 봉기의 효시 / ‘동학 농민 혁명’

서울에서 고속철도로 3시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학 농민군의 발상지인 전라도에 이른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 광주 민주화 운동(키워드 참조)의 기념 묘지에 들렀다. ‘여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다’라고 쓰여 있었다. 상영되고 있는 비디오에는 동학 농민군의 싸움도 소개되어,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민중 투쟁’의 효시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학당의 난’으로 오랫동안 불려 왔지만, 동학 농민군 투쟁은 한국에서는 ‘난’ 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역적으로 간주하여 왔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치고야 재평가가 진행되었다. 포괄적으로 역사의 재검토를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 2004년에는 명예 회복 특별 입법까지 제정되었다. 지금은 ‘동학 농민 혁명’이라 부르며, 그 기념관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처음에는 조선의 신분 사회에 이의를 주장하였고, 다음에는 군화발로 짓밟으며 들어오는 일본을 밀어 내고자, 농민군은 싸웠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 하에 있었던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지방 자치의 원형과 같은 체제를 유지한 것을 보면, 확실히 민주화의 선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념관의 이영일(李永日)연구원에게 물었더니, 농민군의 주된 무기는 죽창으로써 화승총을 겨우 면한 정도의 것을 지고 있으면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6연발총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은, 병사 1인당 농민군 100명과 필적했다.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만 명이라고도 5만 명이라고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10배에 달한다는 설도 유력하다는 말을 복수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판명 되지 않고 있다. 명예회복에 즈음하여, 그 자손에 대한 조사도 정부 주도로 2009년까지 계속된다.

▼광주 민주화 운동

한국에서 1980년5월,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씨 등의 신 군부가, 계엄령 하에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씨 (후에 대통령) 등을 체포했다. 이를 계기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학생과 시민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한국군은 전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을 해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정부는 사망자 193명으로 발표하였다.

▼동학

860년에 최제우=사진=가 창시했다. 한국의 원광 대학교에서 동학을 강의하는 박맹수(朴孟洙) 교수는 “신분 제도가 남아 있는 당시의 조선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귀중하다는 주장에, 차별을 받고 있던 농민들이 반응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은 악정을 바로 잡는 것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척외척양’을 외쳤다.

화이질서의 붕괴 / 그 숨통을 끊다

외적 배제를 주창한 동학 농민군이지만, 청나라 군과는 싸운 흔적이 없다. 왜 그들은 일본군만을 눈앞의 적으로 삼은 것일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이며,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과 같았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받치고, 청나라는 답례로 ‘선정을 베풀도록 하시오’라며 조선의 왕임을 인정해 준다. 조공 체제라고 하는 것으로, 상전•부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부하라고 할지라도 독립국인 것이다.

중국 다이렌(大連)에서 만난 랴오닝(遼寧) 사범대학 역사학부의 꾸어티에춘(郭鐵椿) 부교수는 “조공 체제는 지배와 착취의 관계가 아닙니다. 속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결점은 있었다 할지라도, 속국 쪽에도 그리 거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을 상전으로 섬겼던 것은 조선뿐만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시아의 ‘부근 일대’가 그러했다. 베트남과 일본의 류큐(琉球), 모두가 중화 세계의 주민이었고, 원래 ‘중국’이라는 것은 현재의 국제법 체제에서 말하는 국명이 아니었다. 그 경계는 지금까지도 애매한 것으로, 엷은 먹물로 쓴 것 같이 어렴풋한 것이었다.

’화이질서’라고 불리는 이 국제관계는 서구 열강이 끼어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숨통을 끊은 것은 청일 전쟁이었다.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고, 내가 인정해 줄 테니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잘 해 봐’라며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중국이라면, 일본은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이 안에서는 내 맘대로 하겠다’라며 제국주의의 선 긋기 전쟁에 참여했고, 거기서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청나라도 단지 느긋한 종주국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조선만 해도 현상 유지인가, 변혁인가를 두고 내부 싸움――게다가 아주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화이질서로부터 떼어 버리기 위해, 이것은 문명인가, 야만인가의 싸움이라고 호소하며 내외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도, 19세기 말의 세계에 있어서는 완전한 억지 이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일본이 침공한 중국의 웨이하이(威海) 연안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무렵의 동아시아가 갖고 있었을 ‘느슨한 일체감’을 버리기 어려운 생각도 든다. 청일 전쟁으로 아시아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그 후에도 머릿속에서 아시아는 외부에 두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시립대학을 방문했을 때, 정재정(鄭在貞) 교수는 ‘주변국의 위협을 강조하여 국내를 한데 모은 것’이 일본이라며,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을 돌이켜 보았다.

“아시아인에게 공감을 주는 슬로건, 즉 아시아의 공통된 가치관. 그것을 일본은 결국 제시 못 하였다”

100년의 불신――.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일본 비판은, 원한보다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탄식에 가까운 것으로 나에게는 들렸다.

(후쿠다 히로키(福田宏樹))

▼그 당시 세계는?

청일 전쟁이 일어난 19세기 말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석권하던 시대였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제품을 팔 시장과 원재료의 공급처가 필요했던 열강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였다.

청일 전쟁보다 조금 빠른 1880년대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횡단 정책을 펴는 프랑스가 수단에서 충돌하였고, 영국이 금과 다이아몬드 광맥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보아)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열강은 아시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프랑스는 1884년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청의 속국이었던 베트남의 보호권을 얻었으며, 3년 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성립시켰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 진출을 놓고 서로 견제하였으며, 청일 전쟁으로 새롭게 열강의 일원이 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은 이 시기, 아시아에서는 유럽 각 국에 비해 희미한 존재였지만, 1893년에 하와이의 왕정을 폐지시키고, 5년 후인 1898년에는 병합해 버린다. 같은 해에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을 획득하였다. 카리브해 제국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자신의 세력 하에 두어,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곤봉 외교’라 불리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

1840 아편 전쟁

1867 일본에서 막번(幕藩) 체제가 끝나고, 새 정부가 성립

1871 일청 수호 조약. 서로 대등한 내용

1873 일본 ‘메이지(明治)6년의 정변’으로 정한론 패배

1874 일본 대만으로 출병

1875 강화도(江華島) 사건. 다음해, 한일 수호 조약으로 조선 개국

1882 조선에서 임오 군란.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짐

1884 청•불전쟁.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1884 조선에서 갑신 정변 일어남. 일본 군과 청나라 군이 충돌

1885 일본과 청나라가 텐진(天津) 조약. 갑신 정변으로 인한 조선으로의 파병 시는 서로 통지하기로 정함.

1894 조선의 갑오 농민 전쟁을 계기로 청일 전쟁 발발

1895 조선 황후인 명성황후, 일본인에게 살해 당함

▼시모노세키(下關) 조약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계속 청나라에게 승리를 거두며, 1895년4월에는 일본 측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청나라 측은 리훙장(李鴻章) 등이 전권 대표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 조약을 맺는다. 청나라는 ①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 ②요동 반도 및 타이완을 할양한다 ③배상금 2억 량(약23억 원)을 지불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러•독•불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이 때의 ‘와신상담’이 러일 전쟁으로 이어진다.

▷▷[역사는 살아있다]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문제 알고도 손안쓰는 내각…한도 가즈토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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