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자 육성공개 자제해 주세요”

  • 입력 2007년 7월 31일 02시 59분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됐다 살해된 고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 30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운구돼 경기 안양시 샘병원 영안실에 안치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됐다 살해된 고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 30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운구돼 경기 안양시 샘병원 영안실에 안치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임현주씨 이후 언론들 인터뷰 경쟁에 우려의 목소리

《아프카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억류된 피랍자들의 육성(肉聲)이 국내외 언론에 잇따라 공개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탈레반과 접촉해 피랍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탈레반의 심리전에 휘말려 결과적으로 사태 해결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26일 미국 CBS방송이 임현주(32·여) 씨와의 전화 인터뷰 내용을 보도한 이후 30일까지 유정화(39·여) 씨 등 피랍자 4명의 인터뷰가 국내외 언론사를 통해 연이어 보도됐다. 》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탈레반이 국내외 여론 조성과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인터뷰를 허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절박함을 호소하는 인질들을 앞세워 한국과 아프간 정부를 압박해 협상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라는 것.

한국테러리즘연구소 최진태 소장은 “탈레반은 상업주의와 센세이셔널리즘에 초연할 수 없는 언론의 속성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며 “언론 인터뷰 다음 단계는 처참한 상황에 있는 인질들의 동영상을 공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대 행정학과 표창원(범죄심리학 전공) 교수도 “협상의 원칙이나 전략 차원에서만 말한다면 국내외 언론이 현재 탈레반의 도구가 되고 있으며 인질을 담보로 한 장사를 도와주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최 소장과 표 교수 모두 “언론들이 과열 속보 경쟁을 지양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대승적으로 협력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인터뷰 성사 과정에서 탈레반은 상당한 금전적 이득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현지 통신사인 아프간이슬라믹프레스(AIP)의 야쿠브 샤라파트 편집장은 30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인질과 연결되려면 현지 중개인 등에게 건넬 상당한 금액지불(special payment)이 필요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KBS도 “탈레반이 인질과의 육성 통화 내용이 담긴 테이프가 있다며 접촉해 온 뒤 전달 대가로 2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24일에는 탈레반이 한국 정부에 피랍자와 전화 통화를 하는 대가로 1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하기도 했다.

피랍자 인터뷰 보도에 대해 피랍자 가족 대부분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일부 가족은 ‘탈레반의 언론 플레이가 길어지면 억류 기간도 늘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피붙이의 생사를 확인한 뒤 더 큰 고통을 겪은 가족들도 있었다. 한 피랍자 가족은 “인터뷰에서 애타게 구조를 요청한 인질들의 가족은 한동안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주위의 위로를 받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가족들은 앞으로 인터뷰가 보도돼도 피랍자가 누구인지와 그에 대한 반응을 일절 밝히지 않기로 했다.

정부 역시 피랍자 육성 보도 자제를 촉구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30일 브리핑에서 “피랍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들도 반갑지만 탈레반의 통제하에 이뤄지는 심리전이기 때문에 보도에 신중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도 “피랍사태의 관련 정황을 파악하는 데 참고가 되겠지만 인터뷰 자체가 피랍자의 무사 귀환에 미치는 영향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가족들과 국민을 동요시키려는 탈레반 측 심리전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성남=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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