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0만 달러 바지소송’ 첫 재판 열려

  • 입력 2007년 6월 13일 20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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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애시당초 세탁소 벽에 붙여 놓은 '고객만족'을 실천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우리' 워싱턴 소비자들은 더이상…."(원고)

"잠깐만요, 피어슨 씨. 자꾸 '우리'라는 표현을 쓰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나'일 뿐입니다."(판사)

12일 미국 워싱턴 지방법원. 바지를 분실한 한인 세탁소 주인을 상대로 5400만 달러(510억 여원·당초 요구액수는 6500만달러였으나 지난주 줄였음)를 물어내라는 소송을 제기한 로이 피어슨(57)씨 사건의 첫 재판이 열렸다.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 취재진과 소송남용 개혁을 위한 시민단체 회원들, 한인 세탁소 연합회원 등이 법정을 가득 메웠다. 상당수 방청객은 가슴에 '6500만 달러 바지소송'이라고 적힌 뱃지를 달았다.

그 자신이 변호사이자 워싱턴 행정법원 판사인 피어슨 씨는 이날 스스로 원고, 변호사, 증인의 1인 3역을 했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을 '소비자 권익'이란 공익을 수호하기 위해 나선 존재로 부각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면서 피고인 정진남 씨의 세탁소를 마치 부도덕한 상거래 관행을 대변하는 '공공의 적'처럼 묘사하려 애썼다.

"워싱턴 사법역사를 다 뒤져봐도 이번처럼 악의적이고 극악한 행동의 사례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규모의 사기를 당한 피해자로서 저는 우리 워싱턴 소비자들을 위해 이 법정에 섰습니다."

피어슨 씨가 계속 '우리' '우리' 운운하자 재판장 주디스 바트노프 판사는 "당신은 그저 자신의 피해를 변상해달라며 나선 '나'일뿐"이라며 '우리'란 표현을 쓰는데 일침을 가했다.

피어슨 씨는 이날 8명의 세탁소 이용객을 증인으로 불러 직접 심문했다. 휠체어를 타고 나온 89세의 한 흑인 노파는 "옷이 물세탁으로 줄어든 것 같다"고 불평하다가 정 씨 세탁소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며 자신을 '나치 피해자'에 비유했다. 나머지 증인들도 옷이 바뀐 적이 있다는 등의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변호인 반대심문에서 증인들은 "분쟁이 발생하고 보상에 불만을 갖기 전까지는 정 씨 부부에 대해 직업의식이 투철하고 밝은 표정의 좋은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변론에 나선 크리스토퍼 매닝 변호사는 "원고(피어슨)는 최근 재정적으로 큰 문제에 봉착했으며 이혼을 한 상태"라며 "원고가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바지는 현재도 버젓이 걸려 있으며 그는 이번 바지 문제를 들고 나오기 훨씬 전인 2002년부터 정 씨 부부에게 여러 벌의 바지들을 갖고 어이없는 불평을 제기해왔다"고 강조했다.

매닝 변호사는 또 "원고는 어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주일에 70시간을 일하는 영어에 서툰 이민자 가정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의 법지식과 법률시스템을 악용하고 있다"며 "정작 피해자는 정 씨 부부"라고 주장했다.

증인심문에 이어 피어슨 씨는 무려 2시간 동안 자신이 이번 소송을 제기한 경위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다 문제의 바지 대목에 이르자 방청객들이 의아해 할 정도의 감정적 고조 상태를 보였다.

피어슨 씨는 "정 씨 부부가 고급 정장 바지를 잃어버려 놓고 싸구려 복제품 바지를 내가 맡긴 것이라고 내놓았다"고 주장하면서 "내 평생, 밑단이 접힌 바지를 입어본적이 없는데 그게 내거라고…."

이 대목에서 피어슨 씨는 마치 숨이 막히는 듯 숨을 멈추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법정 밖으로 걸어나갔다.

잠시후 돌아온 피어슨 씨는 판사에게 나머지 진술을 서면으로 제출하고 싶다고 했으나 판사는 이를 거절했다. 피어슨 씨는 그 와중에도 "5400만달러에 추가해 시간당 390~425달러를 쳐서 내가 나를 변호한 변호사 비용도 받게 해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다. 정 씨 부부의 진술 및 심문은 13일 열린다.

첫 공판후 MSNBC 방송이 인터넷을 통해 "액수는 지나치지만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피어슨의 논리에 일리가 있다"와 "말도 안된다"는 두가지 설문을 놓고 투표를 실시한 결과 5만6000여명의 응답자중 97%가 "말도 안된다"에 투표했다.

피어슨 씨는 2005년 바지 분실을 놓고 정 씨 부부와 분쟁이 빚어지자 자신은 자동차가 없으므로 앞으로 10년간 주말마다 다른 세탁소에 가기 위해 500번 이상 렌터카를 이용해야 하는 금액, 2년간 소송 준비를 위해 쓴 개인시간 1400시간에 대한 고급인력 인건비 등 온갖 명목을 붙여 6500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주 이를 5400만달러로 줄였다. 그는 세탁소의 '고객만족 보장'이라는 광고 내용을 문제 삼아 '고객만족 보장'이라는 표지를 붙여놓은 세탁소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워싱턴과 미국, 전 세계에서 찾아 모두 제출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정 씨 부부는 그동안 세차례 합의를 시도해 1만2000달러 보상안을 제시했으나 결국 결렬됐다.

피어슨 씨의 2년 임기 행정법원 판사직은 5월 2일자로 임기가 끝났으나 아직 경질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의 연봉은 1만 달러 가량이다. 워싱턴포스트 등은 바지를 실제로 잃어버린건지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피어슨 씨가 판사로서 갖춰야할 판단력과 건전한 상식 및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다는 뉘앙스의 보도를 하고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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