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요? 워낙 잦아서 신경 안써요”

  • 입력 2007년 3월 19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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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요?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일어난 일인데요 뭘…."

방콕 시내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한 태국인의 말. 지난해 9월19일 손티 분야랏끌린 육군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 친나왓 총리 정권을 무너뜨린 지 6개월이 지났지만 군부가 앞세운 수라윳 출라논(63) 총리 과도내각의 통치 아래 놓인 태국 국민들의 표정에서 그늘을 찾기는 힘들었다. 쿠데타가 벌어진 직후에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방콕 시민들은 입을 모았다.

쿠데타라면 공포정치와 유혈극부터 연상되는 기자에게는 너무 의외로 느껴진 태국인들의 표정이었다.

●"선거나 쿠데타나…."

14년째 방콕 생활을 해온 무역회사 직원 오현주 씨(34)는 쿠데타 발생 당시 마침 한국에 있었다. 태국인 친구들이 걱정돼 서둘러 전화를 걸었던 그는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중"이라는 친구들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별 일 아닌데 왜 자꾸 괜찮은지 묻느냐"라는 반응이었다.

6개월이 지나 기자가 방콕 중심부의 쇼핑몰인 파라곤 백화점에서 만난 태국인들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40대의 한 용역회사 직원은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탁신 전 총리가 과격한 정책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보아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태국인들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나 쿠데타를 통한 정권교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엔 태국 특유의 정치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70여년간 19차례나 벌어진 잦은 쿠데타는 국민의 의사를 묻지 않은 무력 정권교체에 태국 국민들의 감각이 무뎌진 가장 큰 요인이다. 또 다른 주요한 이유는 태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푸미폰 아둔야뎃(80)국왕. 1946년6월 왕위를 계승해 현재까지 자리를 지켜온 국왕에 대한 신뢰가 확고하기에 쿠데타가 가져올 혼란도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

쿠데타에 실패해도 처벌이 가볍다는 이유도 잦은 쿠데타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방콕의 외교 소식통은 "주요 협력자들도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할 뿐이며 단순 가담자들은 팔굽혀펴기를 서너 차례 한 뒤 원대 복귀한 적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방콕 시내의 출라롱콘 대학에서 만난 라트 사딩(방송학과 2학년) 씨는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종교적 영향으로 운명을 믿는 일반 시민들은 쿠데타가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죠." 중생 구제라는 목적을 지닌 한국의 대승불교와 달리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태국의 소승불교가 정치적 개인주의까지 불러온다는 설명이다.

●군부 통치하의 불안한 정국과 미래

태국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주식매매 차익 19억 달러를 세금 한 푼 안내고 착복한 탁신 총리의 부정부패 △전 정권의 언론통제 △정부 재정지출 관리 △남부 분리주의 운동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데다 잇따른 정책 실패가 이어지면서 군부 지지도는 90%(지난해 9월말)→70%(10월말)→45%(올해 2월초)→36%(2월말)로 갈수록 바닥으로 떨어졌다.

군부의 대표적인 실책은 지난해 12월의 외환규제책 발표. '애국'을 앞세운 배타적 정책으로 하루 만에 증시에서 8160억바트(약 21조4000억원)가 날아갔고 외국 투자자들은 자본을 빼갔다. 태국정부가 곧바로 규제안을 철회했지만 국가신인도는 이미 하락한 뒤였다.

출라롱콘 대학의 자이 웅파콘 교수(정치학과)는 "지금 군부정권은 한마디로 무능한 정부"라며 "부패한 탁신 정부도 문제지만 민주주의 시스템 발전에 역행하는 군부 쿠데타는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군부가 내세운 표면적인 탁신 제거 이유는 부정부패. 그러나 심층을 들여다보면 의료보장과 교육수혜 확대라는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세우며 6년간이나 집권한 탁신의 높은 인기가 태국의 전통적인 기득권 세력인 왕실, 세습관료, 군부의 3대 축을 위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국내외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로 인해 주변국을 맴돌며 국내 복귀를 노리는 탁신의 움직임 자체가 여전히 태국 정국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탁신 지지세력의 역 쿠데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반면 쿠데타의 악순환을 끊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태국 비정부기구(NGO)와 시민운동 단체의 노력도 이제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태국 시민운동 관계자와 학생 수백 명은 18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과도정부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여 시민의 힘을 과시했다. 시민단체인 대중민주주의운동(CPD)의 수리얏 사이 사무총장은 "정치에 무관심한 태국의 정치문화로 인해 쿠데타가 되풀이돼왔다"며 "앞으로는 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쿠데타 반대 운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콕=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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