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레이스키-강제이주 70년]<4>‘아리랑’ 공연 그후 17년

  • 입력 200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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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3일 창극 아리랑 공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국립 소브레메니크 극장. 멀리는 최고 2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달려 온 고려인들이 아리랑을 따라 부르며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0년 9월 3일 창극 아리랑 공연이 열렸던 모스크바 국립 소브레메니크 극장. 멀리는 최고 2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달려 온 고려인들이 아리랑을 따라 부르며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0년 소련 6개 도시에서 진행된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에는 관객으로 앉아 있던 고려인들이 무대로 올라와 출연자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90년 소련 6개 도시에서 진행된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에는 관객으로 앉아 있던 고려인들이 무대로 올라와 출연자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려인 2세인 알렉세이 신 모스크바주립대 교수. 그는 뇌중풍으로 기억이 흐려졌지만 “17년 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창극 아리랑 공연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다.
고려인 2세인 알렉세이 신 모스크바주립대 교수. 그는 뇌중풍으로 기억이 흐려졌지만 “17년 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창극 아리랑 공연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다.
《40여 년간 미소 냉전의 벽이 가로막았어도 고려인들은 여전히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 옛 중앙아시아에서는 최근 한국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등 한류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문화가 처음 옛 소련 땅에 선보인 것은 1990년 9월 사상 첫 소련 순회공연인 창극 ‘아리랑’을 통해서다. 이 공연은 서로 잊고 살던 한국인과 고려인이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돼 겪은 고난의 역사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고려인들에게 이 공연은 이국땅에 흩어져 살던 동포들이 한민족임을 확인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순회공연 당시 객석에 앉아 자신의 가족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던 알렉세이 신(77) 모스크바주립대 교수와 이 작품의 연출가 손진책(59) 씨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

“가혹한 삶 헤쳐나갈 정신적 힘 얻어”

■ 알렉세이 신 모스크바주립대 교수

“아리랑 공연은 소련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의 정체성과 단결을 이끌어 낸 사건이었지. 그 덕분에 지금 고려인들이 어느 사회에서든 적응할 수 있는 최적의 생존 능력을 갖추게 됐어요.”

1937년 일곱 살 때 우즈베키스탄행 강제이주 열차를 탔던 고려인 2세 알렉세이 신 모스크바주립대 교수는 올해 희수(喜壽)를 맞는다. 그는 몇 가지 단어를 빼곤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러시아어 발음도 흐릿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개간하던 일과 혈혈단신으로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따던 얘기를 꺼내면서 호방한 기품을 되찾았다. 그는 “타바리시(소련 시절 ‘동무’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말), 내 인생이 러시아 고려인의 산 역사”라는 말을 반복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의 고려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50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가혹한 생존경쟁으로 내몰렸다. 그렇지만 어느 사회에서도 적응을 잘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가장 모범적인 집단농장을 운영했다. 고려인들이 농작물을 잘 길러 소련의 식량 문제를 해결한 것을 목격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공산당 간부들도 사석에서 나를 만나 ‘고려인들의 창의성에 감탄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강인한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1997년 러시아 사회과학원에서 모스크바주립대 역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알려진 과학아카데미를 왜 떠났나.

“쥐꼬리만 한 월급 때문이었다. 당시 내 월급은 89달러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그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 주립대로 갔다.”

―러시아 학자들과 학생들은 한민족을 어떻게 보는가.

“자원도 별로 없고 땅덩어리도 좁지만 기적을 이뤘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러시아가 본받을 나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한민족으로서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학생들 앞에서 한국의 성장 모델을 자신 있게 얘기하는 것이 내 생애 마지막 보람이다.”

―지금 한국의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러시아에 들어와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이런 일은 우연이 아니다. 러시아 소비자들은 한국 제품의 품질을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 그들 주위의 고려인이 훌륭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17년 전인 1990년 9월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창극 아리랑 공연 당시 모스크바 고려인연합회장을 맡고 있었다.

―1990년 9월 이전 고려인들은 소련 시민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나.

“결코 그렇지 못했다. 당시까지 고려인들은 소련 내 소수민족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아리랑 공연은 고려인의 민족의식을 결집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당시 800여 명의 고려인 관객들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흘린 눈물의 의미를 한국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공연으로 고려인들은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처음으로 집단적 동질감을 느꼈다. 이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아리랑 공연 이후 고려인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나.

“아리랑 공연은 잠자던 민족의식을 깨웠다. 그 공연에서 확인된 민족의식은 1993년 4월 고려인 복권(復權)의 원동력이 됐다. 나는 그해 3월 러시아 최고회의 민족문제 자문위원회에 나가 고려인의 완전한 복권을 주장했다. 그 회의 직전 수많은 고려인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이 불법이었다는 각종 서류를 최고회의에 전달했다. 고려인들의 깨어 있는 민족의식과 단결이 없었으면 복권 결의안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동아일보서 지원… 공연 내내 눈물바다”

■ ‘아리랑’ 연출했던 손진책 씨

손진책(사진) 극단 미추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공연 내내 객석은 눈물바다였고 공연이 끝난 뒤 고국의 소식을 듣기 위해 동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고 아리랑 공연 당시를 회상했다. 그토록 ‘조국’에 목말라 있는 고려인 동포들의 존재조차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한 심정이었다는 것.

―아리랑을 창극 형식으로 무대에 올리게 된 계기는….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창작 창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윤봉길 의사와 의적 임꺽정, 홍범도 장군 같은 위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차례로 만들었다. 아리랑은 처음부터 소련 공연을 위해 준비했고 작가 김지일 선생과 함께 현지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중국 공연을 위해 ‘안중근’을 준비했는데 무산됐고 소련에만 다녀왔다.”

―고려인 강제이주사는 당시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소련 여행이 가능해진 1989년 모스크바를 갔다가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에서 고려인이 만든 ‘트란지트(이주) 37’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를 다룬 것이었다. 고려인 배우들이 서툰 한국말로 연기를 했지만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대본을 준비했다. ‘아리랑’은 한국에서 잘 모르던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측면도 있다.”

―우리 동포들의 반응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 동포들도 내용을 쉽게 이해했다. 직접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조국에서 공연단이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동포들은 예전에 가난했던 고향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조국이 올림픽을 개최했다고 하니 너무나도 놀라워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마라톤 중계를 보면서 경기보다는 거리 모습 등 고국의 풍경을 더 관심 있게 봤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 노인은 ‘공연을 보고 향수와 억눌렸던 한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며칠 동안 밥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현지 고려인들에게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70여 명의 공연단을 이끌고 국교도 없었던 소련 지역을 순회하면서 공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공연 시간이 다 되도록 세트가 도착하지 않아 현장에서 급히 제작한 적도 있다. 지방의 한 집단농장 부설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는 비행기로 부친 의상과 악기, 장비가 공연 시작 전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피리 등 갖고 있는 장비를 사용해 즉흥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그제야 짐이 도착했다.”

―아리랑은 소련 공연 이후 사장되다시피 했는데….

“1991년 신년음악회 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몇 대목만 다시 선보였는데 이어령 선생이 극찬했던 기억이 난다. 기회가 되면 다시 공연하고 싶지만 창극의 대중적 인기가 높지 않아 쉽지 않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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