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美 초보정치인 ‘신선한 내부고발’

  • 입력 2006년 1월 3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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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는 철자 4개짜리 단어(four letter word)라는 표현이 있다. ‘fu*k’라는 욕설 외에도 방귀(fart) 배설물(shit) 등 듣기 거북한 단어가 공교롭게도 알파벳 4개인 경우가 많아서 생긴 말이다. 요즘 미국 워싱턴에서는 돼지고기인 ‘pork’도 금기어 범주에 들어간다. 의원끼리 나눠 먹는 예산이란 비유적인 표현이 주는 거부감 탓이다.

미 의회에도 한국처럼 의원끼리 ‘내 지역구 도로건설에 얼마’ 하는 식의 예산 나눠 먹기가 성행한다. 워싱턴 정치권에서는 예산에 꼬리표 달기(earmark)라는 표현을 쓴다. 통상 도로예산은 건설교통부, 지방정부에 뭉칫돈을 주면 우선순위에 따라 연방정부나 지방정부가 구체적 예산을 배정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1994년 이후 공화당 지배하의 의회에서 ‘꼬리표 달린 예산’이 크게 늘었다. 매년 여름과 겨울철 의회가 한 달 동안 쉬는 7월, 12월 말이면 내용이 긴 법안 가운데 수십만∼수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될 문구가 한두 줄 들어간다. 자세히 살펴볼 틈도 없이 ‘탕 탕 탕’ 치는 의사봉 소리와 함께 법안은 통과되기 십상이다.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은 지난해 자기 지역구인 일리노이 주에 ‘대평원 고속도로’를 놓는다며 2000억 원을 끌어갔고, 돈 영 하원 교통위원장은 인구 2만 명 정도인 이름 모를 섬과 알래스카 본토를 잇는다며 2300억 원을 당겨 갔다. 이들의 의정 경력은 19년, 31년으로 최고참 의원.

다행스럽게도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워싱턴 문화를 거부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도 존재한다. 산부인과 의사 출신으로 비타협적 보수성향을 보인 오클라호마 주 토머스 코번 상원의원이 주인공. 그는 하원의원 6년, 상원의원 1년을 지낸 초보 정치인이다. 그러나 ‘신뢰의 붕괴’라는 책을 통해 동료 공화당 의원들이 “표가 되니까, 남들이 하니까…”라며 원칙을 훼손하는 사례들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해스터트 의장을 두고는 “정부의 낭비성 지출을 견제하려면 척추이식수술이 필요하다”라고 아프게 꼬집기도 했다. 또 영 위원장에게는 “(생색내려고) 알래스카 다리 건설에 헛돈 쓰지 말고, 허리케인 때문에 다리가 무너진 뉴올리언스에 새 다리를 놓자”며 예산의 재조정을 요구했다.

당내에선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신선함 때문인지 주간 이코노미스트에는 지난주 코번 의원을 칭찬하는 칼럼까지 등장했다. 한국에도 동료의원의 예산 따내기를 매섭게 비판하는 정치인이 나올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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