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파드국왕 타계]‘王의 형제들’ 권력투쟁 나설까

  • 입력 2005년 8월 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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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를 사실상 23년간 통치해 온 파드 빈 압둘아지즈(84) 국왕이 1일 사망하고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82) 왕세제가 왕위를 잇게 됨에 따라 향후 사우디 정국 전개 추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우디의 국왕은 세계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관리자라는 종교적 위상과 최대 산유국으로서 갖는 정치 경제적 비중으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전쟁으로 중동지역에 반미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어 이슬람 종주국의 정권교체가 아랍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안정 속의 불안=외신들은 이날 파드 국왕의 후계 구도가 이미 확정돼 있고 10년 전부터 압둘라 왕세제가 외교 국방 등 국정 전반에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해 당분간 사우디 정정의 동요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왕족 간의 권력투쟁.

특히 파드 국왕의 친형제 6명은 압둘라 왕위 계승자의 통치권 확립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이들은 내무장관, 국방장관 등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무카바라트(비밀경찰)’를 장악하고 있다. 무력을 바탕으로 이들 형제가 뭉칠 경우 언제든지 이복형인 압둘라 계승자를 몰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압둘라 계승자도 정규군인 국가방위군의 통수권을 갖고 있지만 정보수집 능력에서 떨어지며, 군부 역시 그에게 완전한 충성을 다하고 있지는 않은 상태다.

압둘라 계승자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여론의 힘.

그가 왕실의 개혁을 바라는 국민 정서를 등에 업고 왕족의 사치와 부패 청산을 주도한다면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중동전문가인 인남식(印南植)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압둘라 계승자가 왕실 보조비와 왕자 품위유지비를 삭감하는 등 점진적인 변화를 이뤄낼 순 있지만 전제왕정을 무너뜨리는 민주화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외관계는?=압둘라 계승자는 기존의 외교정책 노선을 일단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과는 대테러정책에서 같은 노선을 취할 전망이다. 사우디 출신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에게 영향을 받은 과격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왕정 타도 기도에서 왕실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도 내정간섭을 자제하는 등 사우디를 크게 자극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인 교수는 “이라크를 시작으로 아랍을 민주화시키겠다는 계획이 이라크의 치안 불안과 이란의 강경파 대통령 당선으로 차질을 빚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웃 중동 국가들에 대해서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친미주의자인 파드 국왕은 미국의 입김으로 OPEC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지만 압둘라 계승자는 OPEC 회원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우디 경제에 유리하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이란과의 소원한 관계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파드 국왕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시장에서 북해산 브렌트유 9월 인도분이 장중 한때 배럴당 61달러를 넘어서는 등 최근 수개월간 급등 후 안정 조짐을 보이던 국제 유가가 다시 요동쳤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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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국왕은…▼

파드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5번째 왕으로 즉위해 친미 친서방 노선과 전통 이슬람교 신앙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를 펼쳤다.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2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산유국 수장으로 세계 유가를 좌지우지했다. 1932년에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이븐사우드 초대국왕과 수다이리 가문의 하사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7명(수다이리 7형제) 중 첫째인 그는 젊은 시절 플레이보이, 또는 몬테카를로 카지노에서 하룻밤에 600만 달러(약 61억 원)를 날리는 도박광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사우디 행정부의 장관급 직위를 얻은 1950년대부터는 180도 달라져 여성 교육을 지원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다.

외교에서는 사우디 왕가와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역점을 뒀다. 이런 외교적 수완은 1970년대 석유파동 때 오일달러가 사우디로 쏟아져 들어오게 만들었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여파는 사우디에도 몰아쳤다. 파드 국왕은 이란이 이슬람교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이에 따라 이슬람 근본주의 학교를 확대하는 데 거액을 투자했다. 그러나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사우디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를 사 1995년 수도 리야드 테러를 시작으로 알 카에다 공격의 주요 타깃이 됐다. 9·11테러 당시 테러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출신임이 드러나면서 미국 정부의 비난에도 시달렸다. 당뇨로 고생했던 그는 골초였고, 1995년에는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는 결국 이복동생인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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