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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16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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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실러의 숨결이 남아있는 집안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시인의 목소리에는 청년 같은 힘이 담겨 있었다.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는 노련함도 더해졌다. 독일인 청중은 우선 시인의 목소리에 압도당했다. 한국어를 알아듣진 못해도 시인의 목소리와 손짓, 눈빛에서 시의 분위기를 읽어내고 있었다. 이어 독일인 낭독자가 독일어로 번역된 시를 읽어 내려가자 고개를 끄덕였다.
15일 오후(현지 시간) 독일 동부의 고도(古都) 예나에서 열린 한국문학 순회 행사에서 50여 명의 청중은 시종 시인과 호흡을 함께했다. 낭독회가 진행된 곳은 ‘실러의 가르텐하우스’라는 문패가 붙은 주택. 독일 작가 실러가 만년을 보내며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트아르트’ 등의 작품을 썼던 곳이다. 예나는 실러 외에도 괴테 피히테 헤겔이 머물며 문학과 철학을 가르쳐 1700년대 후반 지식인들의 메카로 자리 잡았던 도시.
시인 정현종 씨가 ‘천둥을 기리는 노래’로 바통을 이었다. 정 씨는 낭독을 끝낸 뒤 “시는 음악”이라며 “잘 읽으면 삼류시도 일류시가 될 수 있지만 못 읽으면 일류시가 삼류시가 된다”고 말했다.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낭독한 신경림 씨의 차분한 목소리는 작품의 서정과 잘 어우러졌다.
낭독회가 끝난 뒤 한 청중이 고은 시인에게 ‘일인칭’을 강조하는 이유를 물었다. 고 씨는 “‘나’를 통해 세계를 만나므로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설명한 뒤 “한국 노래를 하나 들려드리겠다”며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예나대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인 얀 뢰너트(29) 씨는 “신경림 시인의 시를 들을 때는 시의 풍경이 저절로 떠올랐다”며 “정 시인의 편안한 낭독도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예나 중심가의 에른스트 압베 서점에서 열린 낭독회에선 소설가 임철우 씨의 ‘붉은 방’, 홍성원 씨의 ‘무사와 악사’가 소개됐다. 백열등의 은은한 빛이 고풍스러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는 분위기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독일인들이 작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예나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인 드레스덴의 시립도서관에서는 소설가 이문열 씨가 독일 고등학생들과 토론회를 가졌다. 토론의 소재는 그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토론회를 주관한 교사들이 이 작품을 선정했다.
소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학생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직접 겪은 일을 쓴 것인가”란 질문에 이 씨는 “1980년대 한국 사회를 빗댄 우화”라고 답했다. “외국어로 번역되면 작가 특유의 문체가 훼손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씨는 “어느 정도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언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나” “지금까지 몇 권이나 썼나” “소설 속에서 ‘일그러진 영웅’은 누구인가” 등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고, 이 씨는 소설의 배경과 메시지를 10여 분간 설명했다.
한편 14일 드레스덴의 에리히 캐스트너 박물관에서 열린 낭독회에선 소설가 이호철 씨의 ‘남녘사람 북녘사람’, 윤흥길 씨의 ‘장마’가 소개됐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연합군의 맹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됐고, 이후 동독으로 편입돼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깊게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6·25전쟁과 이념 대립을 소재로 한 두 작품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드레스덴대에서 기계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우베 타이허(26) 씨는 “두 작품 모두 흥미로운 테마”라며 “한국 소설을 처음 접하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청중은 “한국도 통일 가능성이 있느냐” “통일을 위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등 현실적인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드레스덴·예나=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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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62명 獨 주요도시 돌며 낭독-강연-토론회▼
14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낭독회를 시작으로 올해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주빈국인 한국의 문학작품을 알리는 ‘한국 문학 순회 프로그램’ 행사가 이어진다.
주빈국 조직위원회(위원장 김우창)는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개막 전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독일 여러 지역에 62명의 문인을 보내 낭독회 강연회 토론회 인터뷰 등의 행사들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달에는 드레스덴과 예나에 이어 라이프치히에서 행사를 열며, 이후 쾰른(4월) 함부르크(5월) 뮌헨(6월) 베를린(9월) 프랑크푸르트(10월) 등지로 옮겨간다.
조직위 황지우 총감독은 “‘한국 문학 순회 프로그램’은 10월 주빈국 행사의 분위기를 달구는 예열(豫熱)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 행사는 조직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행사 중 하나. 홀거 에링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조직위 부위원장은 “이번 행사의 규모는 전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 경비는 전액 국고에서 지원된다. 이를 계기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언론과 문학 출판계에 한국 문학이 얼마나 소개될지 주목된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주빈국 조직위 집행위원장에 이기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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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대한출판문화협회 부회장, 한국출판연구소 이사를 지냈고 한국출판유통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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