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1955년 원폭개발 결정”…“6·25때 美 위협에 전전긍긍”

  • 입력 2004년 12월 1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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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번째로 원폭 실험에 성공한 중국의 핵개발 비사(秘事)가 지난달 30일 공개됐다. 다음은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 첸룽왕이 전한 비사 내용.

1955년 1월 15일 오후 3시 중국 권력의 심장부인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 마오쩌둥(毛澤東) 당 주석은 극비리에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참석자는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런비스(任弼時) 등 중앙서기처 서기 4명과 펑전(彭眞) 펑더화이(彭德懷) 덩샤오핑(鄧小平) 리푸춘(李富春) 보이보(薄一波) 등 정무원(현 국무원)의 부총리급 고위 간부 6명.

중국은 1945년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폐지한 뒤 56년 부활시켰던 만큼 당시에는 중앙서기처가 공산당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회의 의제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이었다. 미국(45년) 소련(49년) 영국(52년)이 이미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데다 중국은 6·25전쟁 당시 미국의 원폭 위협에 전전긍긍했던 만큼 이 문제는 국가 안보의 최대 현안이었다.

특히 마오는 건국 5주년 국경절인 54년 10월 1일 중국을 방문한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핵무기 기술 이전을 요청했다가 “돈이 너무 많이 드니 경제개발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는 면박을 받았던 터였다.

회의에 앞서 칭화(淸華)대 출신의 프랑스 유학파로 퀴리연구소에서 근무했던 핵물리학자 첸싼창(錢三强)과 지질전문가 리쓰광(李四光)이 중국의 핵개발 가능성에 대해 보고했다.

첸은 “원자핵 파괴 장치인 선회가속기(사이클로트론)와 원자로 제조기술만 습득하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리는 “당시 광시(廣西)성 등에서 우라늄 매장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핵 개발을 주장했다. 3시간여의 회의가 끝난 뒤 만찬이 이어졌다. 흥분한 표정의 마오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날은 붉은 포도주로 건배를 제의했다.

이날 회의는 기밀 유지를 위해 기록은 물론 기념사진조차 남기지 않았다. 9년 뒤인 64년 10월 중국은 마침내 프랑스(60년)에 이어 세계 5번째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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