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회고록 전세계 동시 발간

  • 입력 2004년 6월 22일 18시 57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회고록 ‘마이 라이프(My Life)’가 22일 전 세계에서 동시 발간됐다. 이 책은 클린턴이 유복자로 태어난 1946년부터 2000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때까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클린턴은 회고록에서 북핵 위기를 비롯해 자신이 재임 중 주도했던 굵직한 정치 외교 사안의 전말은 물론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마이 라이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1994년 3월 말 북한 핵 위기의 심각성이 마침내 수면에 떠올랐다. 북한은 2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관들의 입북에 동의한 후 3월 15일 그들이 조사 활동을 마무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1주일 뒤 나는 패트리엇 미사일을 한국에 보내고 유엔에는 경제제재를 가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이후 3일 동안 “선제 군사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강경 경고를 반복했다.

한편으론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이 평화로운 해결책을 선호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균형을 잡았다. 나는 북한이 미국과 협력하여 핵 프로그램을 포기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잘 이해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과는 대혼란일 것이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핵담당 대사를 통해 카터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앞서 3주 전에 나는 전쟁 발발시 양측에 발생할 심각한 손실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받았다.

6월 16일 카터가 평양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할 준비를 한다면 우리도 대화로 돌아가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북한이 그렇게 할지 확실하지 않았다. 과거 경험으로 봐서, 나는 북한을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으며 북한이 정책을 바꾸겠다는 공식 확언을 받을 때까지 제재조치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2000년 10월 10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백악관에서 만났다. 군복 차림의 조 부위원장의 백악관 방문은 북한 관리로서는 최초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동아일보 자료사진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북한과의 합의는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되는 것을 일본은 원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제네바 회담은 1개월간 중지됐다.

10월 셋째주 들어 좋은 소식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8일 나는 16개월간의 집중적인 협상 끝에 한반도의 핵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합의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제네바 기본 합의문이 탄생한 것이다.

내가 공직을 떠난 뒤 미국은 북한이 1998년 실험실에서 2개 정도의 핵탄두를 만드는 데 충분한 양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위반은 아닐지라도 협정의 정신을 위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으로 인해 1994년 협정의 유효성을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가 종식시킨 플루토늄 프로그램이 뒷날의 실험실 건보다 훨씬 큰 사안이었다. 만약 북한의 원자로가 계속 가동됐다면 북한은 매년 몇 개씩의 핵폭탄을 만드는 데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나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거의 마무리한 단계였다. 나는 부시 대통령이 협상을 끝내기 위해 북한에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별말 없이 듣기만 했다.

우리는 남한 참여 없이 단독으로 북한과 협상하는 것을 거부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남북 관계에 가장 큰 희망을 던졌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 본 뒤, 내가 북한을 방문한다면 핵 협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중동 평화 현안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지구의 반을 돌아 북한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특히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방북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박혜윤기자 parkhyey@donga.com

▼르윈스키 스캔들▼

모니카 르윈스키는 1995년 여름부터 1996년 4월까지 백악관에서 일했다. 1995년 말 예산안에 관한 의회와의 협상이 결렬돼 연방정부의 기능이 정지됐다. 이때 처음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고, 그 뒤로도 몇 번 더 있었다.

1997년 봄 다시 르윈스키를 만났다. 그에게 “이것은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당신에게 옳지 못한 일이므로 그만 두자”고 말했다.

1998년 1월 21일, 워싱턴포스트는 내가 모니카 르윈스키와 정사를 가졌다고 보도했다. 내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했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같은 달 27일 힐러리는 방송에 출연해 “이는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우익 진영의 음모”라고 말했다.

힐러리에게 고백한 것은 8월 15일이었다. 아내는 배를 걷어차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저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당신과 첼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첼시에게 말하기는 더 어려웠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기 마련이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딸의 사랑과 존경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는 8월 17일의 청문회를 포르노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의회와 국민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끔 고안된 질문들을 던졌다.

청문회가 끝난 뒤 국민 앞에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으며 모든 사람, 심지어 아내까지 속인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 나 자신의 분노가 가시지 않아 충분히 뉘우치는 기색을 보여 주지 못했다.

다음 날 우리 가족은 휴가를 떠났다. 속으로는 차라리 하루 종일 일만 하고 싶었다. 아내와 딸은 내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계속 용서를 빌었고, 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 백악관에 돌아가서도 2개월간 소파에서 자야 했다.

9월 10일에는 각료들을 모아 사과했다. 대부분 내가 이기적이고 멍청했으며 자신들을 8개월간 우롱했다고 생각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대통령에게 실망했지만 우린 다시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도나 섈레일라 보건장관은 좀 더 가혹하게 “리더는 정책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도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힐러리와 함께 약 1년 동안 매주 카운슬링을 받았다.

조경복기자 kathycho@donga.com

1993년 1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의회통과를 위해 캠페인을 벌이기 전날, 클린턴이 전직 대통령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왼쪽부터 조지 부시 전 대통령, 클린턴,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사진제공 도서출판 물푸레

▼성장과정▼

어머니는 내 이름을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2세의 이름을 따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라고 지었다. 내 친아버지는 결혼 2년8개월 만에 익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스물세 살,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6개월째 자라고 있었다.

아름답고 쾌활했던 어머니는 27세 때 뷰익 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던 로저 클린턴과 결혼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빌리 클린턴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 끝에 총을 쐈다. 총알은 나와 어머니 사이의 벽에 박혔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학대는 날로 심해졌지만 나는 우리 집의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삶의 정상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1975년 10월11일 빌 클린턴과 힐러리 로댐은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벽돌집의 거실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사진제공 도서출판 물푸레

●갈색 머리 안경 쓴 여학생, 힐러리 로댐

워싱턴의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뒤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해 두 번째 학기를 맞을 무렵, 숱이 많은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쓰고 화장을 하지 않은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앞으로 뻗었던 손이 힘없이 돌아왔다. 내 몸이 반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는 일이 내 힘으로는 중단할 수 없는 일을 시작하는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며칠 후 그 여학생이 도서관 반대쪽 끝에서 내게로 걸어왔다.

“당신은 계속 날 쳐다보고 나도 계속 당신을 돌아보고 있으니 서로 이름쯤은 알아야겠네요. 저는 힐러리 로댐인데요, 당신은요?”

1975년 나는 변호사가 된 힐러리가 출장간 사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던 아름다운 벽돌집을 샀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하던 그 작은 집 기억나? 그거 내가 샀어. 당장 나랑 결혼해 줘. 그 집에서 나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1975년 10월 11일, 우리는 새로 산 집의 커다란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백악관을 향하여

클린턴은 2000년 대통령 휴양지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왼쪽 끝),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함께 중동 평화 협상을 벌였다.-사진제공 도서출판 물푸레

1987년 봄, 나는 마흔 살이었지만 이미 대통령 선거 출마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92년 민주당 후보로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러닝메이트 앨 고어와 내가 사무실 벽에 붙여 놓은 핵심 구호는 딱 세 줄이었다.

‘변화 대(對) 같은 것의 반복! 경제가 문제란 말이다, 이 바보야! 의료보험을 잊지 마라!’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24시간 일하면서 컴퓨터를 이용해 다른 당의 활동을 추적했다. 지금은 모두가 하는 것이지만 당시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결과가 나오자 조지 부시 대통령이 축하 전화를 했다. 그는 정중한 어조로 순조로운 정권이양을 약속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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