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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16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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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월트디즈니사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사마 빈라덴가(家)의 특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도’를 배급하지 말라고 자회사에 요구했다. 미라맥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오른 화제작이다. 문제작이 나왔는데도 “우리 손으로는 극장에 풀지 못하겠다”고 뒷걸음치는 디즈니의 모습은 ‘정치적 고려’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비판적인 영화와는 거리를 두려는 속내인 것 같다.
20세기폭스사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투모로우’를 이달 말 미국에서 개봉한다. 한창 영화 홍보에 바쁠 때인데 정부 눈치까지 보느라 이중으로 고생이라는 소식이다. ‘투모로우’는 지구온난화로 남극의 빙산이 녹아내리고 기상이변에 이어 빙하기가 닥쳐온다는 내용인데 부시 행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을 목표로 한 교토의정서의 비준을 줄곧 거부해왔다.
폭스사는 영화를 홍보하면서 가능한 한 ‘지구온난화’가 이슈로 제기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영화 웹사이트에 소개된 줄거리에도 ‘지구온난화’란 말은 아예 없다. 폭스사는 환경단체에 보낸 개봉 행사 초청장을 부랴부랴 취소했다가 반발이 생기자 번복하기도 했다. 환경단체들은 영화 개봉 때 극장 앞에서 지구온난화의 실상을 알리는 자료를 나눠줄 계획이며 부시 대통령의 환경정책에 맹공을 퍼붓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 같은 논란과 관심에 즐거워해야 할 폭스사는 “이 영화는 단순한 재난영화”라고 강조하며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관련짓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할리우드가 이렇게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단순한 ‘부자의 몸조심’일까. 50, 60년대 살기등등했던 매카시즘의 망령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럼 충무로는 어떤가. 불과 얼마 전까지 자본과 소재의 이중 족쇄를 차고 있던 한국 영화산업은 요즘 축제분위기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말죽거리 잔혹사’ ‘아홉 살 인생’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등 흥행성이나 작품성에서 나름대로 평가를 받은 영화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 초점이 대부분 과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굴곡 많은 현대사, 그중에서도 60∼80년대의 폭력적이고 엄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다.
예전엔 다루기 힘들었던 소재를 짚고 넘어가고 싶은 영화인들의 의욕과 대중의 호기심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정면 대결하기보다 감상적으로 포장하거나 우화적으로 에둘러 접근하는 어정쩡한 자세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 오늘을 성찰하는 작업이 아니라, ‘단순 회고’나 단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영화가 오래 버티기를 기대하기엔 세상과 대중의 변화속도가 너무 빠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검열도 없어졌다. 그렇게 소원해 마지않던 ‘영화 예술’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이제 거의 없다. 이쯤 해서 영원할 것 같던 홍콩 영화의 반짝 전성기를 돌아보고, 돈 맛에 취한 할리우드가 어디로 가는지도 살펴볼 때가 아닌가 싶다.
박수칠 때 더 바짝 긴장해야 한다. 뒤돌아보는 한국영화를 다시 돌아봐야 할 이유다.
고미석 문화부 차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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