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기현/리투아니아 탄핵 그후

  • 입력 2004년 4월 8일 19시 03분


집권 15개월 만에 의회의 탄핵으로 물러난 롤란다스 팍사스 리투아니아 대통령(47)은 탄핵 다음 날인 7일 비서실 직원들과 작별 오찬을 한 뒤 대통령궁을 비워 주고 입원했다. 5개월 동안 탄핵정국에 시달리며 혈압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인구 360만명의 소국 리투아니아가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후 요즘처럼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유럽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팍사스 대통령으로서는 억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로 의회 내에 변변한 지지세력이 없었던 그가 ‘젊음과 변화’를 내세워 당시 발다스 아담쿠스 대통령(77)을 누르고 집권한 것은 이변이었다. 그는 옛 소련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급진적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탄핵 사태에 휘말린 팍사스 대통령은 “나를 몰아내려는 구세력의 음모”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탄핵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20만 리타스(약 4억6000만원)의 선거자금을 준 러시아 기업인이 마피아와 연관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실수는 인정하지만 이것이 탄핵받을 정도의 범죄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탄핵이 결정되자 “명예롭게 받아들인다”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말을 아꼈다. 탄핵정국이 진행되는 동안 대규모 시위도, 의회에서의 충돌도 없었다. 소수의 대통령 지지 의원들이 표결을 거부하거나 반대표를 던졌을 뿐이다.

탄핵 절차를 마친 의회는 지금 대선 일정을 논의하고 있다. 의회 의장으로 탄핵을 주도했던 아르투스 파울라우스카스 대통령 권한대행은 “민주주의의 시련이었다”고만 말했다.

요즘도 매일같이 정변이 끊이지 않는 옛 소련 지역에서 리투아니아 국민과 정치권이 보여준 이성적이고 성숙한 태도는 독립 13년째의 신생국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이다.

리투아니아가 왜 옛 소련 국가로는 처음으로 다음 달 유럽연합(EU)에 가입해 선진 유럽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을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기현 모스크바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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