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황유성/“대만 선거 패자는 국민”

  • 입력 2004년 3월 26일 18시 41분


25일 오후 대만 총통부 앞 광장에는 확성기를 통해 장송곡을 연상시키는 비장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온종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시위를 벌이던 5000여명의 군중은 “하느님, 중화민국을 보호하소서!”라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음악은 다시 힘찬 행진곡풍으로 바뀌었다. 험난한 국제환경 속에서 굳건히 버텨 나가는 대만을 찬양한 ‘그 누구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어(誰都不能欺負他)’라는 노래였다. ‘중화민국의 노래(中華民國頌)’라고도 불리는 이 곡이 나오자 광장은 삽시간에 국기 물결로 뒤덮였다.

이곳의 이름은 카이다거란(凱達格蘭) 광장. ‘원주민’이라는 뜻의 대만 소수 민족 말이다. 2000년 대만 출신인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자신의 취임을 축하해 기존 총통부 광장의 이름을 바꿨다.

24일부터 카이다거란 광장은 ‘민주 광장’으로 불리고 있다. 광장 입구에는 ‘민주’라는 거대한 간판이 세워졌고 ‘뜨거운 피로 대만을 구하자’는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총통 선거가 끝난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천 총통 음모설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여대생 장모씨(21)는 “롄잔(連戰)과 쑹추위(宋楚瑜)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의 민주와 미래를 위해 투쟁한다”고 울면서 말했다. 퇴근하자마자 넥타이 차림으로 달려 온 선모씨(31)는 “천 총통이 물러날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목청을 돋웠다.

싱가포르 화교인 류모씨(47·여)는 “중국 영국 인도 말레이시아인이 섞여 있어도 싱가포르는 서로 단합해 잘 산다”며 “국민을 두 동강 낸 천 총통은 큰 실수를 했다”고 비난했다. 퇴역 군인 린모씨(78)는 총통 피격이 천 총통측의 자작극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이번 시위는 야당 지지자뿐 아니라 대학생 회사원 지식인 등 자발적인 참여자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선거에 대한 의혹이 깊다는 증거다.

시위 현장을 닷새째 취재 중이라는 방송기자 류모씨(32)는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와 민족을 두 동강 냈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의 패배자는 대만 국민이다.”

타이베이=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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