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먹은 방재시설]<하>부실교량 없애려면

  • 입력 2002년 9월 11일 18시 42분


《태풍 등 자연재해가 닥칠 때마다 빠지지 않고 피해를 보는 게 교량이다. 행정자치부 산하 국립방재연구소에 따르면 수해로 유실되거나 붕괴되는 교량은 연평균 100여개에 이른다. 이번 태풍 루사로 피해를 본 교량만도 전국적으로 200여 곳이나 된다. 이처럼 매년 수 백 개의 교량이 수해로 피해를 보는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설계나 시공 때 안전과 홍수방재 개념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부실 교량 실태〓국립방재연구소에 따르면 수해로 유실되는 교량의 대부분은 1970년대 만들어진 일명 ‘새마을 다리’와 80년대 표준설계도가 등장하면서 만들어진 이른바 ‘붕어빵 다리’ 들이다.

각 지역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새마을 다리는 홍수방재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체 안전에도 문제가 많아 건설 직후인 70년대만도 매년 240여개가 각종 재해로 피해를 입었다.

▼글 싣는 순서▼

- <상>실태와 대책

80년대에 들어 표준설계도를 이용한 똑같은 설계로 마치 붕어빵을 찍어내듯 만든 교량도 하천의 유량, 지형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약간의 홍수에도 유실되거나 붕괴되곤 한다.

90년대에 들어서도 대형 교량을 제외하면 거의 홍수방재 개념을 반영하지 않은 채 만들어졌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하천 내 교량의 위치, 지형, 유량, 유속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철도 교량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 상태다. 일제 때 만들어진 것이 그대로 사용될 정도로 노후된 데다 도로 교량과는 달리 우회선로를 만들기 어려워 재 가설이 쉽지 않다. 또 정비나 보수도 열차운행 상태에서 행할 수밖에 없어 한계를 갖고 있다.

이번 수해로 교각 2개가 붕괴된 경북 김천의 감천철교는 약 100년 전인 1903년에 세워졌다.

국립방재연구소 측은 “수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교량의 기초를 암반에 박지 않고 암반에 밀착해 세우는 식으로 시공이 이뤄졌다”며 “이 때문에 하천의 변화 등으로 기초가 약해져 교각이 암반 위에 약간 떠있는 노후 교량도 상당수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량 건설시 고려할 점〓전문가들은 교량의 홍수방재 개념과 관련해 교각 사이의 거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각 사이가 좁을 경우 각종 부유물들이 교각에 많이 걸려 물의 흐름을 차단함으로써 물의 하중이 커지면서 그대로 다리에 전가돼 재해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수해 때 붕괴된 전남 광양시 옥룡면 교량 2곳의 경우 교각 사이의 거리가 5∼9m에 불과해 자체 붕괴는 물론 하천 범람의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0년 개정된 하천설계 기준은 교각간 거리가 최소 12.5m 이상 되도록 하고 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교량이 ‘도로 건설의 부수적인 장신구’로 시공되는 것도 재해 발생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교량은 교각의 수가 적을수록 물의 흐름이 원활해 안전과 홍수방재 기능이 높아지지만 이렇게 하려면 상판의 두께를 보다 두껍게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연결도로보다 교량의 높이가 높아지게 돼 연결도로 수 십m를 경사지게 만들어 교량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도로 건설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시공사들은 도로와 교량의 높이를 억지로 맞추다보니 자연스레 교각의 수가 많아져 수해에 취약하게 된다. 또 물이 굽이치거나 유속이 빠른 곳에 교량을 만드는 것은 매우 위험한 데도 교량 건설 때 이런 위치에 대한 고려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립방재연구소의 한 연구관은 “도로 건설 계획을 먼저 세운 뒤 교량을 만드는 게 통상적인 교량 건설 방식”이라며 “교량을 만들 때는 상시 변화하는 하천에 대한 고려가 절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수비〓태풍 루사로 인한 재산피해는 5조4600여억원.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복구비용은 8조원에 이른다. 눈앞의 비용 부담에 급급한 결과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교량 복구작업에는 물론 교량 건설에도 하천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교량을 만들 때 설계 단계에서 하천에 대한 정밀한 고려가 없어도 마땅히 제재할 방법이 없는 상태. 따라서 공사 발주기관이 처음부터 시방서에 유량, 유속 등 하천에 대한 고려를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시공상의 잘못’으로만 규정돼 있는 교량 하자에 대한 개념을 ‘홍수방재 기능의 미비로 인한 피해’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건설재해예방 정찬욱 이사는 “일선 공무원들의 전문성 부족도 교량의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교량 담당 공무원은 해당 분야 전문가가 장기간 근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또 “재해로 인한 복구비용을 고려한다면 다소 돈이 더 들더라도 처음 건설할 때부터 잘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덧붙였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선진국에선…하천·절개지 전담기관서 지속적 관리▼

방재시스템은 시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운용. 수많은 절개지와 교량, 하천 관리를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른바 방재 선진국들은 이들 시설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을까.

▼미국▼

각 지역의 교량담당 전문 공무원이 수 십년씩 한 교량을 지속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해당 교량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또 점검은 기능직 공무원이 담당하지만 보수는 전문 기술자가 맡는다. 교량 담당자는 근무시간의 절반 가량을 반드시 현장 점검에 할애해야 하며 테네시주의 경우는 근무시간의 70%를 현장 점검에 할애하도록 하고 있다.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격년으로 전문 기술자가 포함된 점검팀이 교량 전체를 정밀 점검한다.

교량 관리를 위한 별도 예산 배정도 특이한 점이다. 기본 예산은 주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 소유자가 부담하지만 부족할 경우 연방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 받는다.

▼일본▼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를 염두에 두고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하천을 관리하고 있다.

하천 관리는 중앙과 지방정부가 나눠서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하천에 대해서는 별도의 전담기구가 마련돼 있다. 이 기구는 하천의 상류, 중류, 하류에 각각 출장소를 만들어 긴급 사태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토록 하고 있다.

제방을 높이 쌓아 범람을 막는 것보다는 일정 부분은 자연스럽게 범람시킨다는 개념으로 하천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

범람을 막아야 하는 부분 외에는 제방을 쌓지 않아 자연스레 물이 넘치도록 해 준설을 따로 하지 않아도 강바닥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건설교통부에 해당하는 국토관리청에서 자체적으로 기상관리를 하는 것도 특이하다.

▼홍콩▼

국토 면적이 좁아 산 정상까지 아파트를 지을 정도로 땅을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절개지가 많은 편. 이 때문에 절개지 관리를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건설부 산하 토력공정청은 모든 경사면지에 대한 개발 인허가와 안전진단을 담당하는 중심부서. 직원만 600여명에 이르며 외국의 유명 기술자들을 지속적으로 데려오고 있다.

절개지를 개발하려면 토력공정청이 실시하는 각종 안전진단을 통과해야 허가를 받을 수 있다.

토력공정청은 경사면의 유형, 위치 등 특성을 조사한 뒤 각 사면마다 코드를 부여해 관리한다. 점검 결과를 바탕으로 사면붕괴 위험도, 파급효과, 인명피해 가능성 등을 고려해 보수의 우선 순위를 정한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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