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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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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목 대나무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 4000여명은 30일 수도 자카르타 시내에서 ‘와히드 결사 수호 결의 대회’를 개최한 뒤 가두시위에 나서 와히드 대통령 탄핵을 위한 MPR 소집을 논의중인 의회 의사당 경내로 진입했다.

와히드 대통령의 고향인 동부 자바에서 상경한 시위대는 이날 의사당 앞의 경찰 통제선에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돼지 피는 먹지 못하지만 와히드 대통령의 정적인 아미엔 라이스 MPR 의장과 악바르 탄중 국회의장의 피는 모두 먹을 수 있다”며 위협하다가 의사당 문을 부수거나 담을 넘어 경내로 밀려들어갔다.
물대포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한 경찰은 통제선이 무너지자 의사당 경내에 새로운 저지선을 구축했으나 동부 자바 등지를 출발한 시위대들이 30일 밤까지 자카르타 시내와 의사당 쪽으로 속속 몰려들어 대규모 유혈충돌이 우려되고 있다.
한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이끄는 최대 정당 민주투쟁당(PDIP)과 골카르당 등 의회 500석 가운데 397석을 차지하는 6개 주요 정당은 이날 의회 본회의에 앞선 정당별 회의에서 와히드 대통령 탄핵을 위한 MPR 특별 총회 소집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와히드 대통령은 이날 두 건의 금융스캔들에 자신이 연루되지 않았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와 국정 운영 개선 실적을 담은 해명서를 의회에 제출했지만 반대파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의회의 탄핵 의지가 확고함에 따라 와히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위기를 정면 돌파하거나 MPR 특별 총회가 개최되기 전 야권에 타협안을 제시하는 정치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와히드 대통령측은 탄핵 절차를 저지하기 위해 “정적 체포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현지 언론이 30일 전했다. 야흐야 사타쿱 대통령궁 대변인은 이날 “최근 발령한 준비상사태를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인사들을 체포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의회가 열리는 동안 수도 자카르타와 와히드 대통령의 고향인 동부 자바에서는 대통령 탄핵 움직임에 반대하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사흘째 진압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동부 자바의 파수루안에서는 시위대가 기독교 교회와 경찰서 건물 등을 공격했으며 학교와 기업이 잠정 휴업에 들어가는 등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사흘째 계속된 와히드 대통령 지지 시위로 동부 자바 지역에서 교회 5곳이 불타고 야당 사무실과 학교가 화염병 공격을 받아 심하게 파손됐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600여명의 특수부대원을 긴급 투입해 시위대를 해산했다.
<권기태·홍성철기자>kkt@donga.com
▼한국교민 15000명 안전대책 수립▼
인도네시아 의회가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강행하면서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현지의 주요 외국 공관들은 30일 미국 대사관에서 긴급회동을 갖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미국 한국 일본 등 자카르타 주재 17개국 공관과 유엔 및 세계무역기구(WTO) 등 5개 국제기구 대표들은 이날 미 대사관에 모여 최근 인도네시아 정세를 논의한 뒤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고 정보를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대사관은 이와는 별도로 상황실을 설치하고 비상근무체제로 돌입하는 한편 교민 1만5000명을 위한 ‘동포비상안전대책’을 수립해 인터넷(www.mofat.go.kr/indonesia)에 게재했다.
대사관측은 유혈 충돌과 대규모 폭동 발생 상황에 따른 단계별 비상 수송대책과 집결지 등을 마련해 공고했으며 지역별 비상연락망을 마련했다.
특히 연일 과격시위와 테러가 벌어지고 있는 와히드 대통령의 고향인 동부 자바주에 사는 한국 교민 800여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군부대와 호텔로 피신할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부 자바의 주도 수라바야 한국교민회의 정언곤 총무는 “수라바야 외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친 와히드 세력의 과격 시위가 악화되면 도심에 위치한 머르큐르 호텔로 피신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확산될 경우 군용 차량을 이용해 해병부대로 다시 이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지역 교민들은 동부 파수루안 지역에서 과격시위를 벌인 시위대 5000여명이 수라바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라면 등 식료품을 대거 구입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이종훈기자·자카르타연합>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