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 탄생 100주년]"욕망을 포기하는 순간 병든다"

  • 입력 2001년 3월 13일 18시 56분


4월13일은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의 획기적 전환을 이룬 자크 라캉(1901∼1981·사진)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라캉은 미궁에 빠진 정신분석학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혁신했을 뿐 아니라 현대 철학, 문화 예술이론, 여성이론, 정신의학, 심리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라캉에 대한 관심이고조되고 있다.

계간지 ‘세계의 문학’ 봄호가 라캉 특집을 다뤘고, ‘에크리’(새물결),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개념’(새물결) 등 라캉의 주요 저작들도 곧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라캉 관련 국내 연구자들의 글을 모은 ‘라캉의 재탄생’(가제·창작과 비평사)도 준비 중이다.

라캉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이론과 업적, 라캉이 오늘날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편집자>

◇그의 이론과 오늘날의 의미◇

▽프로이트로 돌아가라〓정신분석가와 사상가로서 라캉의 업적은 ‘프로이트로의 복귀’ 혹은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적자(嫡子)를 자임하는 소위 정통 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이단자’로 비난받았고, 심지어는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축출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는 라캉의 구호에서 잘 드러나듯이 라캉은 프로이트가 오해 왜곡, 혹은 망각되고 있다며 프로이트의 본래 의도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라캉은 크리스, 하르트만, 뢰벤슈타인 등 미국 정신분석학자(자아심리학자)들이 ‘미국적 생활양식’에의 적응을 정신 치료의 본질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의 치료 목표는 순응이나 적응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정신병은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포기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윤리적 주체, 정상적인 주체란 ‘순응’을 목표하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주체라고 주장한다.

▽언어와 세 범주〓정신분석학에서 차지하는 욕망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언어를 매우 중시한다. 주체는 창조적인 언어 활동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발견함으로써 병리적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정신 분석의 목표는 분석가의 처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문제를 스스로 찾아가며 ‘결핍’의 긍정적 의미를 성찰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프로이트 복귀를 철저히 수행하기 위해 라캉은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라는 세 범주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철저히 재해석했다.

라캉은 이 세 범주를 이용해 외디푸스 콤플렉스, 여성성, 병리현상 등 정신분석학의 핵심 개념 및 이론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세 범주를 명확히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 이론을 정확히 전개하기 위해 라캉은 플라톤, 하이데거, 소쉬르, 퍼스, 크립키, 괴델 등 수많은 철학자나 논리학자들의 이론을 활용했다.

▽현대철학과 라캉〓라캉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프랑스에서 알튀세르, 메를로―퐁티, 들뢰즈, 크리스테바, 데리다, 바디우 등의 탁월한 철학사상이 동시에 형성돼 가고 있던 시기였다.

상당수의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은 라캉의 강의를 직 간접적으로 들으며 자신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만일 유럽의 현대사상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의 연관성을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캉을 받아들이든 혹은 비판하든 라캉 정신분석학은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준거점이었다. 푸코의 ‘성의 역사’나 들뢰즈의 ‘앙티―외디푸스’도 결국 프로이트와 라캉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철학계뿐 아니라 정신분석학계와 정신의학계에서도 라캉의 영향은 매우 크다. 그 영향은 프랑스 벨기에를 비롯한 남부 유럽과 중남미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며, 현재 독일어권을 거쳐 점차 영미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라캉 이전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정신분석학을 발달심리학적 차원에 국한시킨 데 반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임상경험과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철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신분석학의 활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의 라캉 연구〓우리 학계에서 정신분석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확산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역시 라캉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나, ‘프로이트로 돌아가라’는 라캉의 구호에 따라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 서양철학이 도입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정신분석학의 수입이 이렇게 늦었다는 것은 우리 인문학이 기형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따라서 라캉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는 것은 국내에 유입된 서양 학문 연구의 방향을 바로잡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양에서는 이미 1920∼30년대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에게 주목했고, 정신분석학은 서양학문의 중요한 부분이 됐다. 국내에서도 라캉에 대한 관심을 통해 정신분석학이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활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자크 라캉 연보◇

△1901년 프랑스 파리 출생.

△1932년 박사학위논문 ‘망상증적 정신병과 개성과의 관계’ 발표.

△1936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거울단계’ 논문 발표. 정신분석가로 개원.

△1938년 파리정신분석학회(SPP) 정회원이 됨.

△1953년 파리정신분석학회 회장 취임한 지 6개월만에 라가쉬, 파베즈―부토니에, 돌토 등이 창립한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에 합류하기 위해 탈퇴. 향후 약 30년간 지속되는 세미나 시작.

△1954년 국제정신분석학회(IPA)는 SFP의 가입신청을 거부.

△1963년 IPA는 SFP의 가입조건으로 라캉을 교육분석가 명단에서 제외하고 라캉의 교육활동을 영원히 금지시킬 것을 요구하자, 라캉은 SFP를 탈퇴.

△1964년 라캉, 파리프로이트학파(EFP) 창설.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축출 당한 후, 알튀세르의 주선으로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세미나 개최.

△1966년 화제의 저서 ‘에크리’ 출간.

△1968년 5월 학생 운동에 지지입장 표명. 라캉의 제자들이 뱅센느대학(파리8대학)에 정신분석학과 설립.

△1980년 EFP를 해산하고 ‘프로이트대의학파(ECF)’ 설립.

△1981년 9월9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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