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문가 기고]"이슬람 빼놓은 세계화는 허구"

  • 입력 2000년 12월 31일 17시 23분


지구촌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세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지만 찬란한 문명과 나름대로의 보편적 인식체계가 존재하는 문화권이 또 있다. 바로 이슬람 세계이다. 그래서 이곳을 중양(中洋)으로 표현하자는 학자들도 있다. 13억명의 종교인구에다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가 55개국이나 되는 거대한 세계이다.

▼서구서 호전성 부각시켜▼

그럼에도 이슬람은 언제부터인가 별로 곱지 않은 인상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일부다처와 여성억압의 사회,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르는 잔인한 종교,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러나 하는 집단 등. 온통 부정 투성이이다.

이슬람이 발아한 중동은 인류가 처음으로 문명을 일구어낸 땅이요, 다양한 이념들이 함께 하는 조화의 산실이었다. 이런 토양에서 이슬람도 과거 1400년 동안 화해와 용서, 절충과 합의를 통한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라는 표현으로 이슬람의 호전성을 부각시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했다.

특히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중동전역은 강대국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경험했다. 공존의 구도가 산산조각 나면서 민족과 종파 간의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이 오늘날의 처참한 중동의 모습이 됐다. 강약이 뒤바뀐 왜곡된 상황은 다른 저항 수단을 빼앗긴 극소수 이슬람 급진세력의 폭력투쟁을 부추겼다.

▼평화-평등이 핵심 사상▼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가 이슬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 걸림돌이었다. 우리 시각에서 이슬람과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들을 식민통치했던 서구의 자료나 잣대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증오를 양상해 왔던 것이다.

이슬람 만큼 독특한 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종교도 흔치 않다. ‘이슬람’이란 뜻이 바로 평화를 의미하듯이, 이슬람 사상의 핵심은 평화와 평등이다. 이슬람은 정교일치(政敎一致)를 추구하면서, 종교를 일상적인 삶속에 완전히 용해시켜 놓았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인 문화로 보아야 한다. 정교를 엄격히 분리하고 있는 서구의 관점에서 느끼게 되는 이슬람에 대한 전근대성이나 이질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에서나 현실에서도 이슬람 세계는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통일신라 이래 이슬람 세계와 긴밀한 교류를 가져왔고,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의 주고 받음이 대단했다. 신라 고도 경주에 호복(胡服)을 입은 이슬람계 상인들이 제 집 드나들 듯 들어왔고, 고려와 조선초기까지도 이슬람 문화의 물결은 교역이라는 젖줄을 통해 펌프질하듯이 우리 문화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오랜 단절 끝에 우리가 이슬람 세계를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오일 쇼크때였다. 그러나 원유의 70% 이상을 중동에서 들여오고, 국가경제의 운명이 걸려 있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우리는 당장의 이해관계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문화-자원보고 제대로 봐야▼

그 결과 중동 건설시장에 연인원 100만명 이상이 진출하고, 그들이 벌어들인 외화로 고도성장의 기틀을 닦았음에도, 이슬람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너무나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21세기를 맞는 오늘날, 이슬람은 붕괴된 사회주의를 대체하고, 변질된 자본주의를 보완할 새로운 이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도 보다 유연한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가까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이는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의 진정한 이해없는 세계화란 허구다’라는 한 인류학자의 외침이 어느 때보다 가슴에 와닿는 새해이다.

이희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중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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