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 '민간인사살' 판결]논란 증폭 예상

  • 입력 2000년 7월 14일 07시 13분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에 의한 민간인 사살 문제는 70년대 초부터 끊임없이 논란이 돼왔다.

베트남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71년 ‘밀라이 학살’ 사건을 계기로 민간인 사살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베트남 현지 피해자와 일부 군 관련자들의 진술 외에 객관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논란’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사살 문제도 미국 언론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올해 4월10일자 특집 기사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사살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사회 일부에서 추진되고 있는 진상규명 노력과 보상움직임을 보도했다.

뉴스위크는 “1967년 4월1일 베트남 남부 빈 쉬안에서 반 토이(당시 38세,현재 71세)의 생후 4개월된 아기와 아내 등 네 가족이 한국군에 의해 사살됐다”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사살이 수천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민간인 사살을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는 없었다. 따라서 31년만에 밝혀진 1969년의 대법원 판결문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대법원 판결은 ‘반증이 없는한’ 진실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대법원이 인정한 한국군 소대장의 사살지휘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다.

대법원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군사법원이 인정한 내용, 즉 “김씨와 소대원들이 매복지점이 아닌 곳에서 민간인들을 체포해 매복지점으로 이동시키다가 클레이모로 사살했다”는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나 김씨는 △전투지역에서 일어난 일이고 △체포된 사람들이 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베트콩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김씨는 또 “사고 직후 베트남 주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해 사태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조사관에게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변협에서 말했다.

이같은 진술에도 의문은 있다. 고문도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주민들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허위자백을 했다는 것이 의문이다.

또 2심 군사재판이나 대법원 재판 당시에는 베트남 주민들의 항의가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재판부가 ‘무고한’ 장교에게 누명을 씌워 오판을 했을 가능성도 적다.

어떤 경우든 김씨 본인과 소대원들은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과 함께 ‘역사의 피해자’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말라이 사건은…▼

‘밀라이(My Lai) 사건’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자행한 최대의 양민학살 사건. 전쟁이 한창이던 68년 3월 16일 벌어진 이 사건에서 임산부와 어린이 등 최소한 504명의 민간인이 사살당했다.

당시 미군은 베트콩 섬멸작전이 번번이 좌절되자 밀라이 마을 등을 ‘자유 발포지역’으로 선포해 총공세를 벌이던 참이었다.

미군 제1보병여단의 윌리엄 캘리 중위와 병사들은 마을에 들어가 비무장 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캘리는 병사들이 잡아온 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에서 사살하도록 지시했고 자신이 직접 어린이 두 명을 붙잡아 구덩이에 넣고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은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군 예비역의 증언으로 71년 세상에 알려졌다. 캘리는 살인죄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74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사면됐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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