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참전용사 3인 "남북정상 악수 벅찬 감동 "

  • 입력 2000년 6월 22일 19시 34분


《6·25 발발 50주년은 해외 참전용사들에게도 남다른 감회를 갖게 한다. 종전 반세기만에 남북의 정상이 화해의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자유와 공산진영으로 나뉘어 낯선 땅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이들은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美 제임스 W 커▼

6·25전쟁에 참전했던 제임스 W 커 박사(79)에게 한국은 남쪽이든 북쪽이든 ‘제2의 고향’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927년 장로교 목사였던 부친을 따라 유년시절은 목포에서, 청소년기는 평양에서 보냈낸 드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

1938년 평양 외국어고를 졸업한 그는 대학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2차대전이 터지면서 군에서 복무하게 된 그는 6·25와 함께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을 사랑하는 제 심장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처음엔 8군 작전처에 배속돼 북한군의 동향을 정탐하는 일을 맡았다. 원산 앞바다와 서해도서 지역에 작전 포스트를 운영하기도 했다. 53년 4월 그는 3사단으로 전보됐고 그 해 7월 중공군과의 김화지구 전투에서 부상해 오른쪽 청력을 상실했다.

“부상을 했지만 한국전에 참전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전란 속에서 한국인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국전 이후 저는 인생을 보다 깊고 넓게 보게 됐어요.”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62년 중령으로 예편해 군무원으로 미 국방부에서 핵무기 관련 업무를 맡기도 했다. 커 박사는 최근 분단 반세기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한반도에 평화 무드가 일고 있는데 크게 고무돼 있다.

“한국은 원래 하나였어요. 빨리 통일이 돼서 다시 남북이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3년 뒤에 한국에 갈 생각인데 그 때 평양에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도 학창시절 자주 갔던 평양 대동문과 기자묘(箕子墓 )등 유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요.”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佛 베르나르 윌만▼

“평양에서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51년 7월 개성에서 열린 첫 휴전회담을 취재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51년

6·25전쟁 종군기자로 전세계에 전황을 생생하게 타전했던 베르나르 윌만(77)전 AFP통신기자는 22일 “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고 말했다.

“런던에서 도쿄(東京)를 거쳐 미 군용기편으로 대구에 내렸을 때 이게 지옥이구나 싶었다. 추위는 뼛속을 파고들고 땅을 뒤흔드는 포성이 계속되는데 시체와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흩어진 거리에는 피란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51년 7월 소련측의 제의로 첫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열린 이후 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시까지 판문점에서 계속된 회담취재를 위해 열차로 서울과 문산을 오갔다.

“회담장 밖에서 공산측 종군기자들과 만나 보드카와 위스키를 나누며 한반도 분단의 경계선이 될 군사분계선이 어떻게 설정될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적대감보다는 목숨을 걸고 전황을 보도하는 종군기자라는 동지애가 더 뜨거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종군기자들은 미국부대 막사에서 지내며 전황 브리핑 내용을 타자기와 전화로 송고했다. 무선전화를 쓸 때도 있었지만 공산군측의 도청 우려 때문에 사용이 쉽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6·25 50주년 행사에 한국 정부 초청으로 방한하는 그는 “한국에 대해서는 늘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동안 한국에 갈 기회가 없었다”며 기뻐했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러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참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군 복장에 인민군 표지가 그려진 당시 최신예기인 미그15전투기를 타고 싸웠다. 유엔군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평양 이남으로는 절대 비행하지 않았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소련군 조종사로는 처음으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한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예비역소장(67)은 22일 소련 공군의 참전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소련은 전쟁 당시 공군의 참전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자 스탈린은 50년 11월 64항공군단을 첫 투입했다. 소련 공군은 안둥(安東) 등 중국에 기지를 두고 미군기를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크라마렌코 장군이 6·25전쟁에 투입된 것은 51년 3월로 176비행연대 소속이었다. 그는 “2차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사들이 한국전에 자원했다”며 “나도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테스트파일럿’으로 근무하다 미군이 사회주의 형제국인 북한을 무차별 폭격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원했다”고 밝혔다.

크라마렌코는 “1주일에 평균 2, 3회 정도 출격했다”며 “51년 10월 내가 탄 전투기가 격추돼 낙하산을 타고 평양 인근에 내렸는데 이것이 전쟁 때 유일하게 한국땅을 밟아본 경험”이라며 웃었다. 그는 “한국전 당시 미군 폭격기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을 오폭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공개하며 “자칫 미소간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전쟁은 의미가 없었으며 앞으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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