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러시아 어디로]강력한 지도자 탄생

  • 입력 2000년 3월 27일 20시 12분


러시아는 젊고 강력한 지도자를 선택했습니다. 구 소련 붕괴 후 시장경제 도입과 민주화를 거치며 극심한 혼란을 겪은 러시아 유권자는 26일 ‘러시아의 재건’을 내건 40대 후보 블라디미르 푸틴을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푸틴의 당선이 독재 체제 부활과 군사대국화로 이어져 역사를 후퇴시키고 국제 질서의 안정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우려입니다. 그가 대국을 제대로 이끌 능력을 갖췄는지에 대한 불안도 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국제 사회는 기대와 두려움 속에 푸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푸틴시대 러시아의 미래가 어떨지, 시리즈로 전망합니다. <편집자>

▼강력한 지도자 탄생…군사대국 부활 우려▼

모스크바 중심가 루뱐카광장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은 악명 높았던 구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연방보안부(FSB)청사. 과거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의 대명사였던 ‘루뱐카’의 입구에는 KGB의장 출신으로 유일하게 최고 지도자에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어쩌면 18년 만에 탄생한 루뱐카 출신 국가원수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흉상이 이곳에 나란히 놓일지도 모른다.

푸틴은 루뱐카와 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인물. 지난해 12월 당시 총리이던 푸틴은 이곳을 방문해 “나는 지금 루뱐카에서 벨리돔(정부종합청사)으로 파견나가 있을 뿐”이라고 농담을 하며 자신이 영원한 KGB맨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KGB의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은 푸틴의 등장에 경악했다. 소련시절 저명한 인권운동가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고(故)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부인인 옐레나 본네르는 대선 직전 영자 일간지 모스코타임스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푸틴의 집권은 새로운 스탈린주의의 부활”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일부 지식인들의 우려와 달리 러시아 국민은 푸틴을 선택했다. 푸틴이 공공연히 “법에 의한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유권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푸틴 지지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계속된 무질서와 혼란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파도 푸틴의 집권이 전체주의 부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우파연합 이리나 하카마다 공동대표는 “자유는 요정 같아서 한번 병에서 나오면 다시 병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며 그동안 자유를 경험한 러시아인들을 과거로 되돌려보내기는 이미 늦었다고 주장했다. 우파는 시장경제개혁만 보장된다면 정치적인 권위주의의 등장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경제적으로는 국가주도의 시장개혁을 추진한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식 개혁방안’이 푸틴 정책의 근간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해졌다. 러시아가 ‘성급한 민주화’로 정치 사회적 무질서와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는 자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옐친 정책의 수정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푸틴의 정책수립에 또 다른 모델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안드로포프식 개혁이다. 푸틴은 “권력은 규율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던 안드로포프가 즐겨 쓰던 말.

푸틴은 선거 공약대로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연장하고 지방정부의 권한을 뺏어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권력강화 작업부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슬라브주의자들은 이러한 강력한 지도력이 러시아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은 무능하고 인기 없는 지도자로 꼽히는 것이 러시아의 정서이다. 푸틴은 이런 분위기를 업고 오랜만에 등장한 강력한 지도자이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대통령은 항상 공산당이 다수인 의회와 언론의 견제로 발목이 잡혔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총선으로 의회는 친(親)푸틴계가 장악했고 언론은 집요한 KGB식 공작으로 무력화됐다. 푸틴은 체첸전을 밀어붙였던 것처럼 군사작전을 하듯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힘’만으로 풀기에는 ‘병든 대국’ 러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뿌리가 깊다는 것이 푸틴의 고민이다.

▼푸틴의 사람들…그레프 경제실세 부상 카시야노프 총리 유력▼

러시아 정치는 서구와 달리 학연 지연에 의해 움직인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은 집권 후 모교인 모스크바대 출신들을 대거 기용했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대통령은 고향인 ‘스베르들로프스크 마피아’를 측근에 포진시켰다.

푸틴의 인맥은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와 16년간 근무한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중심. 푸틴의 정치적 토양은 ‘페테르부르크 마피아’. 동향(同鄕)인 아나톨리 소브차크 전 페테르부르크 시장과 아나톨리 추바이스 연합전력(UES)사장은 푸틴의 정치적 대부. 특히 부총리와 대통령행정실장을 지낸 크렘린의 실력자 추바이스는 푸틴을 중앙 무대로 끌어올려 그가 옐친의 후계자가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푸틴 주변에는 KGB 후신인 연방보안부(FSB)의 니콜라이 파투루셰프 부장과 여성부총리인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새 경제정책 ‘푸티노믹스’의 설계자인 게르만 그레프 사유화부차관 등 페테르부르크 인맥이 핵심 요직에 있다. 특히 그레프는 앞으로 경제 분야의 실세로 급부상할 전망. 야당인 공산당 소속이면서 푸틴에 협력하고 있는 겐나디 셀레즈뇨프 하원의장과 세르게이 스테파신 전 총리도 페테르부르크 사람들.

푸틴은 대통령 대행이 된 뒤 대통령행정실차장을 모두 KGB출신으로 바꿨다. 친위정당인 연합당의 원내대표인 보리스 그리즐료프도 KGB출신. 푸틴 정부의 첫 총리로는 미하일 카시야노프 경제부총리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시야노프는 그동안 서방과의 협상을 이끌어왔기 때문에 내각의 얼굴로는 적격이라는 평. 그러나 푸틴이 추바이스를 총리로 지명해 그동안 진 빚을 갚으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42세 신세대 퍼스트레이디 류드밀라 새바람 일으킬듯▼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선자의 부인 류드밀라(42)는 역대 크렘린의 안주인 중 가장 젊은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가 됐다. 그러나 첩보기관에 오래 몸담았던 푸틴 못지 않게 류드밀라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가족 사항이 철저히 비밀에 가려졌기 때문. 류드밀라가 공개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푸틴이 총리가 된 이후. 지난해 9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의 부인 라이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처음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러시아 서부 칼리닌그라드 출신의 류드밀라는 전문대를 나와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일할 때 국가보안위원회(KGB) 페테르부르크 지부에 근무하던 푸틴을 극장에서 처음 만났다. 푸틴이 KGB 첩보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한눈에 그에게 반한 류드밀라는 3년 동안 적극적으로 구애한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푸틴을 만나기 위해 아예 페테르부르크로 유학 와 푸틴의 모교인 페테르부르크대에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전공했다. 파견 나간 남편을 따라 동독에서 5년간 살아 국제 감각도 있다는 평.전통적으로 크렘린 안주인은 대외 활동보다는 조용히 내조하는 것이 관례. 유일한 예외는 고르바초프의 부인인 철학교수 출신의 라이사 정도였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신세대인데다가 학력도 높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무거운 분위기의 크렘린궁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류드밀라는 남편이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직후 체첸을 전격 방문했을 때도 동행해 화제를 모았다. 푸틴부부는 예카테리나(14)와 마리아(13) 등 두 딸을 두고 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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