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러 정국 어디로]김학준 본보고문 현지 분석

  • 입력 1999년 5월 15일 08시 53분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 탄핵안이 15일 국가두마(하원)를 통과한다고 해서 그가 곧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최고법원과 헌법재판소를 거쳐 연방회의(상원)가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동의할 개연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옐친의 권위는 상당히 떨어지게 됐다. 벌써부터 여론의 초점은 그가 과연 임기를 제대로 끝낼 수 있을 것인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그와 그의 가족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로 쏠리고 있다.

91년8월 구소련 공산당 강경파와 공모한 군부의 반동적 쿠데타에 용감하게 맞서 싸워 민권의 승리를 끌어내면서 그는 곧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공산당 불법화와 소련 해체에 앞장서면서 그는 역사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그는 구소련의 후계국가인 러시아연방의 민선대통령으로 두 차례나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웅이 몰락했는가. 첫번째 이유는 러시아의 국내외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공산당이 불법화되고 소련이 해체되면 자유롭고 넉넉하게 살게 될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 앞에 펼쳐진 것은 범죄의 급증, 치안의 혼란, 부정부패의 만연, 살인적인 물가 오름세, 빈부격차의 확대 그리고 ‘2류국가’로 떨어진 데 따른 자존심의 상처 등이었다.

여기에다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뭉쳐 구소련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며 95년 하원선거 때 다수표를 얻게 됐고 러시아 정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몇해동안 옐친을 계속 압박해 온 세력이 바로 이 러시아연방 공산당과 당수 겐나디 주가노프다.

두번째 이유는 옐친 개인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그가 악화된 건강 때문에 ‘병상통치’ 또는 ‘휴양지 통치’를 하게 되자 ‘옐친 이후’를 노리는 야심가들이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면서 그의 권위를 잠식해 왔다. 공공장소에서도 폭음을 주저하지 않는 그의 알코올중독에 가까운 과음은 그의 건강과 권위를 동시에 해쳤다. 최근 모스크바의 ‘무명용사의 비’에 헌화하기 위해 걸어가다가 좌우의 부축을 받는 사진이 크게 보도되자 그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이유는 집안의 권력형 부정부패다. 아내와 큰딸은 조용한 편인데 둘째딸 타티아나 디아첸코가 온갖 비리와 부패에 연루돼 있다고 대다수 국민이 의심하고 있다.

정부의 주요 인사에는 물론 대형 국책사업에 모두 개입해 엄청난 권력과 재부(財富)를 축적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녀를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내 장칭(江靑)과 마르코스의 아내 이멜다의 복합이라며 수군거리고 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손잡은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전 독립국가연합(CIS)사무총장의 매우 나쁜 평판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사람들은 베레조프스키가 타티아나를 매수하고 ‘공범’으로 만든 뒤 그녀를 통해 옐친에게 접근해 권력을 농단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은행들과 국책기업들을 장악해 국정을 혼란시켰으며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부정축재했다고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다.

여론은 그와 그녀를 모두 구속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며 들끓고 있다. 하원 일각에서는 옐친마저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느낀 옐친은 내무장관 출신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르게이 스테파신을 제1부총리로 승진시켰다가 보름만에 총리로 다시 승진시켜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력을 중심으로 상황에 대처하려 했으나 오히려 국민의 반감만 더 높여놓았다.

러시아에서는 벌써부터 ‘옐친 이후’를 놓고 많은 추측들이 나돈다. 현재 러시아에는 주요 정당들만 무려 13개나 있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이번에 총리직에서 해임된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 유리 루즈코프 모스크바 시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소련이후 러시아 최고권력자는 대머리와 머리숱이 많은 사람의 순서로 바뀌어 왔다. 대머리 레닌→숱이 많은 스탈린→대머리 흐루시초프→숱이 많은 브레즈네프→대머리 안드로포프→숱이 많은 체르넨코→대머리 고르바초프→숱이 많은 옐친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다음은 대머리 주가노프 공산당당수차례라고러시아사람들은 진담반 농담반으로 말한다.

옐친의 반격을 내다보는 사람들도 가끔 만난다. 퇴임이후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현재 부분적으로 거론되는 ‘러시아와 벨로루시의 통합’을 전격적으로 성사시켜 새 헌법을 만들고 자신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게 만듦으로써 탈출구를 찾으려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은 ‘영웅의 몰락’을 확실하게 예고하고 있다. 어쩌면 공산당의 집권마저 내다보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12월 하원선거 결과가 매우 주목된다.

〈모스크바〓김학준 논설고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