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뉴 패러다임(上)]10가지 ‘변화의 싹’

  • 입력 1998년 12월 31일 18시 06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에 인류가 맞게 될 변화의 성격을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행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패러다임이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딛고 서 있는 ‘준거의 틀’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1962년 명저 ‘과학혁명들의 구조’에서 패러다임(Paradigm)이란 말을 처음 쓴 이래 이 말만큼 우리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말이 없다. ‘인식의 틀’로도 번역되는 패러다임은 한 시대, 한 공간의 가치체계의 총체적 구조를 의미한다.

새 밀레니엄이 가져올 변화를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와 성격을 띠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변화의 징후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동아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단초가 될 10개의 변화와 현상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를 상하로 나눠 싣는다.

상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전자민주주의 공화국 △제3의 길 △세계 단일 통화 △사이버국가를 다루고 하는 △지식사회의 끝 △아기 공장 △성(性)능력 확대산업 △환경산업의 미래 △장기(臟器)교체를 다룬다.

[도움말 주신 분]

강세호박사(姜世昊·삼성 SDS 컨설팅사업부장) 박형준교수(朴亨埈·동아대·사회학) 이문웅교수(李文雄·서울대 인류학) 이상희의원(李祥羲·한나라당) 이성봉박사(李晟鳳·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정진홍교수(鄭鎭弘·서울예술종합학교) 허만형교수(許萬亨·건국대 사회복지학) 허진호박사(許眞浩·㈜아이네타사장) 게리트 공(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연구원)

[팍스 아메리카나]

21세기에도 당분간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하의 세계평화)’는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의 힘은 달러와 항공모함으로 상징된다. 세계 일류기업들이 미국시장진출에 사활을 걸고 중앙은행들이 금고의 70%를 달러표시 자산으로 채워두는 한 미국의 힘은 여전히 막강할 수밖에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분쟁에 군사개입할 수 있는 능력도 미국만이 지녔다.

전문가들은 중국 정도를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로 꼽고 있다. 이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추산대로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절반수준에 도달하는(전체경제규모는 3배) 21세기 중반에 주목하고 있다. 이 때쯤이면 중국의 위안(元)화가 주요 기축통화로 등장하게 된다. 첨단 대양해군 건설에 따른 중국군의 해외파병도 가능해져 미국이 더 이상 제삼세계 분쟁을 자국의 논리로 재단하기 어렵게 된다. 화폐통합을 성사시킨 유럽연합(EU)도 ‘팍스 유러피아’를 외치고 나올 가능성이 많다. 유러화를 달러에 대한 선전포고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중국과 유럽이 미국과 견줄 수 있으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국제적 리더십 확보를 위한 지도이념이 바로 그것. 미국처럼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인가치 존중 등의 전파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중국의 ‘아시아적 가치’나 유럽의 ‘제3의 길’이 세계인의 반향을 얻지 못하면 중국과 유럽은 지역맹주에 그칠 수도 있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전자 민주주의시대]

민주(民主)라는 이념은 근대 이후 줄곧실정법상으로만존재하는‘이상향’으로 간주돼 왔다.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는 선거와 국회라는 대의(代議)정치형태로만 나타날수밖에없었기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달라진다. 정보통신 혁명이 제공한 사이버공간에서 아테네시민들이 누렸던 직접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안방에 앉아 컴퓨터화면을 보고 클릭하는 순간에 공직선거의 당락이 결정되고 주요정책들에 대한 찬반이 가려진다. 투표장에 갈 일도 없고 투표용지에 붓두껍으로 기표할 필요도 없다. 직접민주주의를 가로막아 왔던 지리적 시간적 물리적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미 미국의 일부 도시에서는 전자민주주의가 보편화되고 있다. 언론학자 마셜 맥루한의 말대로 정치는 대의(代議)로부터 선거구의 전 주민이 정책결정과정에 즉각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이미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전자민주주의는 그러나 컴퓨터와 인터넷의 독점, 또는 상업적 이용으로 인해 대중 선동이나 중우정치를 초래할 위험도 함께 갖고 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전자민주주의의 보편화에 앞서 우선 △컴퓨터통신망의 구축 △인터넷의 보편화 △방송의공영화등이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종래기자〉jongrae@donga.com

[떠오르는 ‘제3의 길’]

21세기에도 자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동아대 박형준교수는 “예측 가능한 가까운 장래에 시장경제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자원 배분체제가 자리잡을가능성은거의 없다”고 말한다.

물론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그 새 얼굴은 지식 정보가 주도하는 ‘탈산업 정보자본주의’이며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본의 지배’로 요약된다.

자본주의가 ‘산업혁명’ ‘생산성 혁명’ ‘경영혁명’의 3단계를 거쳐왔다고 규정하는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지식이 다른 생산요소를 제치고 중심요소가 될 것’임을 단언한다.

경제학자인 레스터 서로는 “미국에 의해 지배됐던 단극(Unipola)경제가 끝나고 21세기엔 다극(Multipola)경제시대가 본격화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다면 ‘제멋대로 질주할 광폭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는건가.

일부에선 스웨덴식의 ‘시장 사회주의’를 거론하지만 미국의 원로 경제사학자인 로버트 하일브로너교수는 “그같은 체제의 운동력은 이제 거의 종착점에 왔다”고 진단한다. 그 대안으로 하일브로너교수는 ‘중앙집권화된 계획경제의 명령도 아니고, 시장의 압력과 보이지 않는 손에 추종하는 것도 아닌 ‘참여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체제’를 내세운다.

〈이기홍기자〉sechepa@donga.com

[세계단일화폐 등장]

지구촌 어디서나 통용되는 단일화폐가 21세기에 나올 수 있을까. 유럽연합(EU)11개국이 단일통화 채택에 성공하면서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단일화폐는 통화가치 변동에 따른 위험이 사라지고 복수통화 사용에 따른 불편과 비용이 사라지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단일화폐 출범은 참여국의 경제지표가 비슷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경제여건들이 크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첫 구상후 무려 45년만에 탄생한 유러랜드(유러화 사용 11개국)도 참여국의 1인당소득 물가상승률 재정적자폭 이자율 화폐가치안정수준 등 경제여건이 비교적 비슷해 가능했다. 여기에 기독교문화, 유럽대륙이라는 공동체의식, 유사한 역사적 경험 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동일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화폐발행 및 금융통화정책의 자주권을 반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근대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국민국가가 스스로 주권의 일부를 반납함으로써 국가라는 개념마저 흐려질 수 있다.

미국의 경제사상가 마틴 펠트스타인박사가 지적하듯이 “유러화 출범으로 EU의 권력이 브뤼셀(EU의 본부)이나 스트라스부르(유럽의회)로 이동하는 현상”을 각국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문제가 먼저 논의돼야 할지도 모른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사이버국가 출현]

국가는 국민 주권 영토의 3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정보혁명은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처럼 새로운 땅, 이른바 ‘가상공간(Cyberspace)’을 인류에 가져다 주었다. 인류는 이제 ‘시티즌’(시민)에서 ‘네티즌’(네트워크와 시티즌의 합성어)으로 바뀌고 있다. 건국대 허만형교수는 “사이버 공간은 영토로서의 3대 조건인 △최소한의 점유공간 △경제적 가치 △정치적 가치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제4의 영토로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교수의 주장뿐이 아니다. 글로벌 해커집단들이 득실거리는 일본에서는 가상국가인 ‘사이버 저팬’이 만들어져 네티즌끼리 대통령까지 뽑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1백만명의 X세대를 규합한 초거대단체 ‘이끌어라, 못하겠으면 떠나라(Lead… Or Leave)’도 미국정치의 주요 급진세력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은 지구 전체를 미국이 구상하는 ‘지구촌 정보 인프라’(GII)산하에 두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그렇다고 해도 기존 국가를 붕괴시킬 만큼 강력한 사이버 국가가 등장할 지는 아직 미지수. 컴퓨터공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사이버 국가 탄생에 대해선 대부분 회의적이다. 심지어 21세기에도 민족주의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공간을 통한 여론 수렴단계보다 진일보한 정치세력, 사이버 공동체가 급속히 늘고 있는 현상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김종래기자〉jongra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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