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현지 시간) 이재명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대통령궁에서 공동언론발표를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앙카라=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튀르키예 방문은 좀 공교롭다. ‘중동·아프리카 4개국 순방’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길에 들른 곳이 튀르키예다. 이 나라엔 시민들이 떨쳐 일어나 6시간 만에 쿠데타를 좌절시킨, 우리와 비슷한 역사가 있다(물론 튀르키예 쿠데타는 2016년 진짜 군이 일으켰고 한국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다).
이를 의식하고 택한 방문지 같진 않다. 그랬다면 분명 “튀르키예와 우리는 자랑스러운 과거사를 공유한다”고 홍보했을 거다. 그래서 공교롭다는 얘기다. 쿠데타 이후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걸 안다면, 굳이 지금 방문해 나같은 사람이 두 나라를 견줘 보게 하진 않았을 것 같다.
바쁜 독자를 위해 이어질 내용을 세줄 요약한다. ① 튀르키예는 숙청과 대통령 중임제 개헌으로 독재를 굳혔다. ② 한국도 공직자 TF를 만들어 숙청에 들어갔다. 개헌도 감행될 수 있다. ③ 언론과 사법부 장악 등 독재 교본을 따른다면, 정권교체는 거의 불가능하다.
● “쿠데타는 신의 선물”…“위기를 기회로”
2016년 7월 16일(현지 시간) 새벽 튀르키예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앞에 군부 쿠테타 세력의 탱크가 나타나자 한 시민이 그 앞에 엎드려 온 몸으로 탱크를 막고 있다. 이스탄불=AP 뉴시스2016년 7월 15일 밤 10시. 쿠데타가 터지자 마침 휴양지에 있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페이스타임으로 CNN튀르크와 인터뷰하며 국민에게 쿠데타와 맞설 것을 촉구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탱크를 막아 세웠고 다음날 새벽 돌아온 대통령은 “국민의 의지”로 쿠데타가 좌절됐다고 선언했다. “이번 봉기는 신(神)의 선물”이라며 철저한 단죄 의지를 밝힌 건 물론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를 넘긴 시각, 당시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은 유튜브 라이브로 국민에게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했다. 시민들이 뛰쳐나와 계엄군을 막아섰다(튀르키예에선 안타깝게도 25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다음날 새벽 윤석열은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6시간 만이었다.
한국에선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가 이어졌다. 대다수 국민은 일상으로 돌아왔고 관련자 재판이 열리고 있다. 그래도 집권세력은 충분치 않은 모양이다(튀르키예 대통령실도 “오늘날까지도 쿠데타 잔존 세력과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작년 7월 주간조선에 썼다). 12·3 관련 공직자를 색출하는 ‘헌법존중 정부혁신 태스크포스(TF)’가 떴고 사법부 장악을 위한 ‘사법개혁’이 감행될 태세다. 내년 예산안에는 개헌안 관련 예산까지 잡혀 있다. 정말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은 이번 튀르키예로 가는 기내 기자회견 중 에르도안 같은 말을 했다. “위기가 오면 기회로 만들자.”
● 실용주의로 집권…민주는 수단이었다
지난해 12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을 몸으로 막고 있다. 뉴스1비슷한 점은 또 있다. 두 대통령이 지방자치단체장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포퓰리즘 정책과 (나름의) 카리스마로 유명하며, 실용주의를 전략적으로 구사한다는 점이다.
이스탄불 시장으로 뜬 에르도안은 보수민주주의와 온건이슬람을 표방한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해 2002년 총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내각책임제의 총리가 된 그는 2007년 대통령 직선제와 7년 단임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2010년엔 집권세력이 판검사 인사에 더 깊이 관여하는 개헌안을 ‘사법부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처리했다. 집권 10년 만에 국내총생산(GDP)을 네 배(2013년 9578억 달러)로 키운 경제 실적이 개헌 국민투표의 막강 동력이었다.
총리 3연임 후 더는 총리를 못하게 되자 에르도안은 2014년 첫 직선 대통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강경 이슬람주의, 권위주의, 부패 본색이 슬슬 드러나고 있었다. 노련한 정치인에게 민주주의는 수단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는 트램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려야 한다”며 ‘계산적 실용주의’를 현란하게 구사했던 것이다.
● 쿠데타 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글로벌 숙청’
2016년 7월 16일 튀르키예에서 당시 쿠데타가 진압됐다는 소식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스탄불=AFP 뉴스1다시 2016년 쿠데타를 돌아보면, ‘조국(앗, 한자로 祖國) 수호자’를 자처해온 군이 국민 불만에 떨쳐 일어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나라 전통 같은 군의 정치 개입을 민의는 더 이상 용납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었다. 에르도안은 쿠데타 배후에 이슬람 학자(이자 망명한 정적인) 페툴라 귈렌과 그 동조세력이 있다며 쿠데타 세력 척결을 구실로 군과 경찰, 판검사, 공무원과 언론인 심지어 민간인까지 16만 명 이상을 숙청했다. 미국 포린어페어스에 ‘글로벌 숙청의 놀라운 규모’라는 글이 실렸을 정도다.
실패한 쿠데타라는 신의 선물을 에르도안은 이듬해 개헌동력으로도 이용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추진해온, 대통령 권한을 대폭 늘린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에 반대가 상당한 상황이었다. 숙청공포와 공안정치 속에 국민투표 51% 찬성으로 간신히 통과됐다. 2018년과 2023년 대선에서 에드로안은 연거푸 당선돼 ‘21세기 술탄’으로 군림 중이다. 흰 냅킨을 보고 대통령이 “파란색!” 하면 모두가 “파란색…”할 만큼.
2014년부터 치면 사실상 대통령 3연임이다. 분명 2017년 개헌에선 대통령 최대 두 번 가능을 못 박았는데 기이하지 않은가.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치러 당선되면 다시 5년을 재임할 수 있다는 헌법 속 신의 한수 때문이다(우리의 대통령 연임제 개헌안에 현직 대통령도 해당되는지에 대해 법제처장이 “국민이 결단할 문제”라고 한 게 떠올랐다). 2018년 에르도안은 국제 이슈로 반짝인기가 오르자 서둘러 조기 대선을 선언했고 가볍게 승리했다.
● 언론과 사법부 장악! 스트롱맨의 독재 교본
튀르키예 검찰이 최근 142개 혐의를 적용해 징역 2430년을 구형한 야권 정치인 에크렘 이마모을루 전 이스탄불 시장. 그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로 꼽힌다. 이스탄불=AP 뉴시스“금리가 낮아야 인플레이션이 잡힌다”는 에르도안의 ‘거꾸로 경제학’ 때문에 민생은 파탄난 지 오래였다(이 또한 우리나라의 ‘호텔 경제학’ ‘금융계급제’를 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선거로 독재 권력을 교체하기 힘들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지적한다. 언론 탄압과 사법부 장악이 첫째 이유다.
2022년 85%가 넘는 물가상승률, 2023년 지진 참사에 대한 정부의 한심한 대응은 국내 언론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최초의 국산차, 최초의 국산 탱크와 함정 등 튀르키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방위산업이나 지도자의 업적이 요란하게 선전될 뿐이다(공교롭게도 이번 양국 정상회담에서 언급된 ‘알타이 전차’가 우리 기술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튀르키예 생산 탱크다).
모든 국가 제도와 자원은 권력자의 무기로 동원된다. 특히 사법권력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11일 야당 소속 전 이스탄불 시장 에크럼 이마모을루에게 부패와 간첩 뇌물 등 다채로운 혐의로 징역 2430년이 구형된 것을 보시라(EU 가입하려면 사형제가 없어야 한다). 집권세력은 2028년으로 예정된 대선을 또 앞당기거나 개헌을 통해 집권 연장을 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독재자의 교본이다. 위기를 기회로, 신의 선물로 삼아 숙청과 개헌으로 1인 권력을 끝없이 확장하는 것.
● 우리 편이면, 독재도 괜찮은가
지난해 12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 계엄군들이 진입하고 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2016년 튀르키예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며, 당시 지식인들의 경고가 틀리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실패한 쿠데타가, 초강력 대통령제 개헌이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고 그들은 지적했다. 에르도안의 강경 시위 대응과 압제가 민심을 떠나게 하고, 경제가 추락해 해외 투자가 끊길 것이라고 외신에선 끊임없이 경고했다.
내가 본 외신과 영어 논문을 튀르키예 사람들도 봤는지 알 수 없다. 가짜뉴스 근절법 같은 언론 탄압과 수년 전 SNS까지 숙청 빌미가 되는 인터넷 검열 때문이다. 경제가 파탄 나도 외국 관광객은 가성비갑이라며 찾아오고, 독재로 소문나도 해외 투자가 끊기기는커녕 이 대통령 같은 외국 정상이 찾아와 원전과 도로 인프라 협력 MOU(양해각서)를 맺는다.
숙청과 대통령 중임제(든 연임제든) 개헌으로 일단 제왕적 대통령이 되면, 내려올래야 내려올 수가 없다. 부패와 권력 남용이 켜켜이 쌓여 퇴임하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해서다. 충성과 특혜를 맞바꿔 온 떨거지 네트워크도 그 좋은 권력을 내줄 리 없다. 심지어 지리멸렬한 야권, 전략적 요충지라는 외교 이슈까지 독재를 돕는 형편이다(한국 얘기 절대 아님!). 세속의 이념만큼 강력한 그들의 이슬람 편향이 ‘우리 편이면 독재도 상관없다’는, 형제 같은 굴종을 낳고 있다.
26일 중동 순방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뒤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서 내리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공교-롭다(工巧롭다); 생각지 않았거나 뜻하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건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