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샘 기자의 고양이끼고 드라마]절실함 없이 가볍기만 한 ‘왕관의 무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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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가십걸’의 한국판 ‘상속자들’

‘상속자들’에서 한때 둘도 없는 친구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김탄(이민호·왼쪽)과 최영도(김우빈). SBS TV화면 캡처
‘상속자들’에서 한때 둘도 없는 친구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김탄(이민호·왼쪽)과 최영도(김우빈). SBS TV화면 캡처
SBS 수목 드라마 ‘상속자들’은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한국판이다.

배경이나 인물 설정부터가 그렇다.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제국고의 알바 소녀 차은상(박신혜)은 뉴욕 맨해튼의 사립고에 다니는 브루클린 소년 댄을, 집안 사정상 미국으로 쫓겨났다 돌아온 김탄(이민호)은 사고치고 도망쳤던 세레나를, 그리고 김탄을 원수 보듯 하는 예전 절친 최영도(김우빈)는 악녀 블레어를 닮았다. 결혼을 전략적 제휴로 취급하는 유라헬(김지원)의 엄마는 세레나의 엄마 릴리를 연상시키고, 아들에게도 가차 없는 최영도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는 최영도의 모습은 ‘가십걸’ 속 척의 모습과도 겹친다.

그런데 ‘상속자들’을 보면 김이 확 빠진다. 한국 지상파 드라마에서 ‘가십걸’처럼 마약이나 총기가 등장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가십걸’은 사건 사고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등장인물들이 그렇게까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서로 증오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속자들’의 에피소드는 유치원생에게 사이즈 안 맞는 명품 구두를 신겨 놓은 것처럼 유치하기만 하다.

대표적인 예가 최영도다. 극 중에서 갈등의 시발점이자 긴장감을 높여야 할 그가 하는 반항이란 왕따를 만들어 폭력을 행사하고 불법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게 전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 역시 아버지의 약혼녀와 가족사진을 찍을 때 아버지의 불륜녀를 불러 훼방을 놓는 정도다. 아버지와 회사 경영권을 놓고 목숨을 건 다툼을 벌이는 척이나, 뒤에선 음모를 꾸미고 겉으론 착한 척하는 데 도가 튼 블레어와는 수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사실 ‘가십걸’에서 모든 갈등의 시작은 ‘내가 여기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세레나가 도망친 이유도, 엄마 릴리가 결혼을 반복하는 이유도, 척과 블레어가 음모를 꾸미는 이유도 현재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가십걸’ 속 2세들은 모두 자신의 평판 유지와 존재 증명을 위해 대학입시 같은 현실적인 관문을 포함한 각종 난관을 통과해 생존해야 했다. 이들의 뒷얘기를 폭로하는 블로그 ‘가십걸’은 이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하지만 ‘상속자들’ 속 2세들은 의무나 책임은 없이 그저 ‘부모가 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힘들다’며 투정을 부릴 뿐이다.

드라마의 원래 제목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상속자들’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왕관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로맨스도 갈등도 다 밋밋해졌다. 멋진 배우와 화려한 배경, 김은숙 작가 특유의 맛깔 나는 애정 신으로도 그 모자란 무게가 채워지지 않는 듯하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상속자들#가십걸#유치#위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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