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피나 바우슈, 좋은 예술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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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5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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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내한공연을 가진 \'봄의 제전\' 공연 모습. 지난해 작고한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작품이다. 1979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내한공연이 열린 지 31년 만에 다시 한국 팬들을 찾았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지난달 내한공연을 가진 \'봄의 제전\' 공연 모습. 지난해 작고한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작품이다. 1979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내한공연이 열린 지 31년 만에 다시 한국 팬들을 찾았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79년 2월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독일 탄츠테아터(무용극단) 부퍼탈의 첫 내한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작품은 '봄의 제전'.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음악에 맞춰 피나 바우슈(1940~2009)가 안무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공연은 동아일보 초청으로 이뤄졌지만 공연 후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무용계의 전언에 따르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공연 후반부 여자무용수의 젖가슴 한쪽이 드러난 것 때문이었다더군요. 당초 2회 공연이 예정됐다가 첫 공연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2회 공연이 취소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기록에 따르면 2월4일은 정식공연이 아니라 워크숍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이 워크숍의 취소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독일 최고의 문화수출상품이 됐던 피나 바우슈와 한국의 첫 만남은 그렇게 열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 3월18~21일 피나의 그 '봄의 제전'이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됐습니다. 31년만의 내한 무대였습니다. 힘차고 강렬하고 빈 틈 없는 군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니진스키의 안무로 첫 선을 보인 '봄의 제전'은 혹독한 겨울을 보낸 고대 부족이 풍요를 기원하며 처녀 한명을 간택해 대지의 신에게 희생제의를 바치는 플롯을 지닌 작품입니다. 니진스키와 모리스 베자르 등 수많은 안무가들은 이 신화적 구조에 숨겨진 원초적 폭력성과 에로티시즘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에는 '훔쳐보기'의 관음증이 알게 모르게 작동하고 있다면 1975년 초연된 피나의 '봄의 제전'은 피해자의 시각이 두드러집니다. 누가 희생양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공포와 최종 선택된 자에 대한 연민이 가득합니다. 거기엔 그 순간을 인류문화의 초석을 놓은 '초석적 살해'의 순간으로 파악한 르네 지라르의 희생이론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피나의 다른 작품과 달리 전통적 무용문법에 충실합니다. 무용수는 음악과 혼연일체가 돼서 일사불란한 군무를 펼칩니다. 검붉은 토탄 위에서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때로는 운명의 힘 앞에 연약한 짐승의 몸짓을 펼치기도 하고 때로는 강렬한 생존본능으로 토탄 위를 구르거나 토탄 더미를 발로 차면서 몸부림칩니다. 희생자의 징표를 상징하는 붉은 천이 옷으로 바뀌고 이를 입은 처녀가 단발마의 춤사위를 출 때 한쪽 어깨띠가 흘러내리면서 가슴이 노출되지만 에로틱하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게 느껴집니다. 1979년 당시 관객의 입장에선 그 노출 자체가 충격이었겠지만 31년 뒤 관객의 입장에선 무대를 가득 채우는 강렬한 에너지와 여전히 현대적인 춤사위가 충격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봄의 제전(사진제공=LG아트센터)
봄의 제전(사진제공=LG아트센터)

이를 지켜보면서 1980년대 초 덕수궁에서 열렸던 국내 최초의 '반 고흐 전'을 봤을 때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시 제 기억에 아로새겨진 작품들은 미술교과서에서 봤던 인상파 화가로서 고흐의 대표작이 아니라 그가 젊은 시절 그린 풍경화 습작이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사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밀하고 사실적이었습니다. "아, 이토록 정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이 바탕이 됐기에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인상주의 그림이 더욱 놀라운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봄의 제전'을 보고 나니 '카페 뮐러'나 '마주르카 포고'의 예술세계가 새삼 위대하게 다가섰습니다. 피나는 자신이 잘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발레에서 무용 일반으로 그리고 다시 몸의 연기로서 무용극(탄츠테아터)으로 끊임없이 예술적 진화를 거듭한 것입니다.

LG아트센터의 '봄의 제전' 공연 앞에는 '카페 뮐러'도 공연됐습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 '마주르카 포고'와 함께 삽입된 이 작품은 1978년에 태어나 본격적인 탄츠테아터의 탄생을 알린 작품입니다. 어둡고 텅 빈 카페에서 비탄에 빠진 여인이 눈을 감고 춤을 추면 남자가 테이블과 의자의 숲을 헤치며 길을 열어주기를 반복하는 이 작품은 결코 타인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없는 본질적 외로움을 표현합니다.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가슴 속 깊이 꾹꾹 감춰뒀던 슬픔덩어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피나 바우슈가 생전에 직접 출연했던 작품 '카페 뮐러'. 이번 내한공연에서도 그녀가 직접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지난해 타계하면서 다른 단원이 대신 맡았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피나 바우슈가 생전에 직접 출연했던 작품 '카페 뮐러'. 이번 내한공연에서도 그녀가 직접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지난해 타계하면서 다른 단원이 대신 맡았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카페 뮐러'는 피나가 직접 출연하는 몇 안 되는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피나는 30여년 간 비탄에 빠진 여성이 무대 앞쪽에서 추는 춤을 무대 맨 뒤에서 따라 추는 여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원래 이번 공연에서도 피나가 직접 출연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6월30일 피나가 갑자기 타계하면서 부퍼탈 단원 중 한명이 대신했습니다. 깡말랐던 피나와 닮은 그 무용수의 고독한 몸짓을 지켜보면서 문득 저 자리를 비운 채 공연이 이뤄졌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전엔 세계 순회공연을 가장 많이 펼치는 예술가이자 가장 유명한 현존 현대무용가로 꼽혔음에도 사생활은 거의 노출되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 빈 자리의 울림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 공연을 기점으로 피나를 추모하는 공연이 잇따라 무대에 올랐습니다.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에 초대된 벨기에 세들라베무용단을 이끄는 알랭 프라텔의 '아웃 오브 컨텍스트-피나 바우슈를 위하여'(4월 2,3일)와 프랑스 현대무용의 기수 제롬 벨의 '루츠 푀르스터'(4월 8, 9일)입니다. 아쉽게도 바우슈의 무용정신을 형상화한 프라텔의 작품은 놓쳤지만 지난 주 남산예술센터에서 펼쳐진 '루츠 푀르스터'는 볼 수 있었습니다. 피나가 죽기 직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카페 뮐러를 보면서 제가 떠올린 방식으로 예술가이자 인간 피나를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동양화에서 달빛이 반사되는 구름을 붉게 물들임으로써 달의 형상을 그려내는 홍운월탁(烘雲託月)의 기법이었습니다.

피나 바우슈의 가장 열정적 무용수를 주인공으로 제롬 벨이 연출한 '루츠 푀르스터' 의 한 장면 (사진제공=페스티벌 봄)
피나 바우슈의 가장 열정적 무용수를 주인공으로 제롬 벨이 연출한 '루츠 푀르스터' 의 한 장면 (사진제공=페스티벌 봄)

'루츠 푀르스터'에는 단 한명의 무용수만 등장합니다. 1975년부터 피나와 인연을 맺은 남자 무용수 루츠 푀르스터입니다. 190cm는 돼 보이는 꺽다리에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자입니다. 올해 57세로 배불뚝이가 된 이 사내는 양복차림으로 무대 위에 등장해 무용수로 자신의 인생행로를 담담하게 털어놓습니다. 가끔 자신이 췄던 춤동작을 독무로 보여주기도 하고 공연도중에 벌어졌던 해프닝을 재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피나 바우슈의 가장 열정적 무용수로서 피나와 헤쳐 왔던 예술가로서의 경험이 녹아있습니다. 웃음과 눈물이 함께 녹아있는 그의 인생행로는 놀랍도록 피나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1978년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정식단원이 돼 수많은 피나의 작품에 출연하고 영감을 주면서 30년간 피나의 세계순회공연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는 피나와 같은 고향(졸링겐) 출신으로 학교도 피나가 졸업한 에센의 무용전문대학 폴크방학교 출신입니다. 게다가 피나가 교수로 있던 그 학교 교수로 1988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젊은 시절 백혈병으로 잃었다는 동병상련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피나는 예술과 인생의 반려자였던 롤프 보르칙을 1980년 백혈병으로 잃었는데 게이인 롤프 역시 7년간 동거했던 미국 태생의 독일인 악셀을 백혈병으로 잃었습니다. 루츠는 당시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태웁니다. 그 순간 지독한 골초였던 피나(그의 사인이 급성폐암이었음을 잊지마세요)가 롤프를 잃었을 때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개집니다.

롤프 보르칙은 1979년 첫 내한공연을 포함한 피나의 아시아순회공연 도중에 백혈병으로 쓰러지고 다음해인 1980년 1월27일 숨을 거둡니다. 아직 30대의 나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봄의 제전'과 '카페 뮐러'의 무대미술을 맡았고 특히 '카페 뮐러'에선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며 통로를 내주는 남자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작품에선 직접 춤을 추는 법이 거의 없는 피나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카페 뮐러'에서만 직접 춤을 췄던 것은 바로 그 때의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밀양북춤 인간문화재로 피나와 무언의 우정을 나눴던 하용부 씨의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피나가 왜 그를 초청하려했던 수많은 도시를 뿌리치고 서울을 선택해 도시연작 시리즈의 하나로 '러프 컷'(2005년)을 만들었을까? 사랑했던 사람과 마지막 여행에 대한 추억 때문은 아니었을까?"

피나 바우슈가 '카페 뮐러'에 출연한 모습 (사진제공=LG아트센터)
피나 바우슈가 '카페 뮐러'에 출연한 모습 (사진제공=LG아트센터)

고인이 된 침묵의 예술가는 말이 없습니다. 그의 인간적 면모가 궁금해져서 요헨 슈미트가 쓴 평전 '피나 바우쉬-두려움에 맞선 춤사위'를 꼼꼼히 읽었습니다. 한국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피나가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름을 '롤프'로 지을 만큼 그를 특별하게 사랑했음은 분명했습니다. 또한 그가 매우 인간적인 예술가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천재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반면 루츠 푀르스터와 같은 자신의 무용수들을 몹시 아꼈는데 자신의 작품에서 불필요한 장면을 삭제할 때도 해당 무용수가 은퇴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또 평론가와 기자들 유명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꺼려하면서도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뒷골목 서민과 노인, 어린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가 택한 예술적 행로는 결코 평탄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그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퍼탈에서조차 한동안 그의 작품이 공연되면 성난 관객이 객석 맨 뒤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던 그녀에게 침을 뱉거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고 합니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 쌍욕과 함께 부퍼탈을 떠나라는 협박을 일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1979년 그가 한국에서 받은 냉대는 그에 비하면 얌전한 편인 셈입니다. 피나는 비록 수줍음 많고 창작을 할 때마다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시로선 매우 독창적 방식으로 그 난관을 돌파했습니다. 바로 세계화전략입니다. 그의 작품의 독창성을 알아볼 예술적 안목을 지닌 관객이 독일 내에선 한정적이지만 세계적 규모로 확대하면 부퍼탈의 보수적 관객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냉대받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세계무대에선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이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피나 바우슈의 생전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피나 바우슈의 생전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19세기 미국의 아메리카원주민(인디언) 토벌사령관이었던 세리던 장군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좋은 인디언은 모두 죽은 인디언이다." 많은 예술가들을 관찰한 제 경험에 따르면 이 말은 이렇게 변용될 수 있습니다. "좋은 예술가는 모두 죽은 예술가다." 여기엔 두 가지 뜻이 함유돼있습니다. 첫째로는 예술가의 진면목은 죽은 뒤에 드러난다는 것과 예술가로서 훌륭한 인물 중에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피나는 이 둘 모두에서 예외입니다. 천재는 보통 주변의 편견과 질투에 희생돼 요절하기 쉽지만 예술가로서 비교적 장수를 누리면서 최고의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아냈습니다. 또 비록 본인은 외롭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예술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인간성 좋은 예술가였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의 작품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세계 대부분의 관객이 그러하듯)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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