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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0월 10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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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개혁정부’를 표방했던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지난 정권의 KBS도 권력의 눈치를 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기계적 중립’에 매몰됐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프로그램 전체를 ‘개혁’이라는 정권의 코드에 맞추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주인은 시청료 내는 국민▼
공영방송 제도는 우리나라 말고도 여러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지만 어디서나 공통분모는 ‘국민의 방송’이다. KBS도 방송 도중 ‘국민의 방송’이라는 멘트를 자주 내보내고 있으니 KBS의 지향점도 같은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공영방송의 주인은 정부나 KBS 종사자가 아닌 국민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국민이 낸 시청료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방송’이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정연주 사장 취임 이후 KBS에 ‘개혁 프로그램’이 양산되는 것을 보면 현재의 경영진은 공영방송의 역할을 상당 부분 ‘사회 개혁’ 쪽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현재 KBS의 ‘개혁 프로그램’들이 내세우는 ‘개혁’이라는 것이 국민이 공감하고 필요성을 인정하는 개혁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자체가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방송이 국민과 국가를 개혁한다는 것에는 우선 오만함이 들어 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방송이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을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그 과정에서 공영방송이 선동이나 의식화 도구로 추락한다면 그것은 곧 사회적 재앙을 의미한다. 민영방송이 상업주의와 선정성으로 치달을수록 공영방송은 정치색 배제, 객관 보도 같은 방송의 본분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국민을 공영방송의 주인으로 존중하는 올바른 자세다.
세계 공영방송의 모범사례로 평가받는 일본의 NHK를 예로 들어 보자. 2년 전 일본에서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우익 성향의 일본 민영 TV들이 보여준 보도 태도는 우리의 분노를 자아냈다. 문제를 일으킨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한편 한국 쪽에 대해서는 격분한 시민의 모습을 주로 내보냈다. 일본에서 TV를 본다면 역사 왜곡을 유발한 단체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반면 한국인들은 몹시 흥분한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 내 우익 성향에 ‘코드’를 맞춘 것이었다.
그러나 NHK는 예외였다. 객관적 사실만 보도하면서 한국 쪽 반응도 일체의 코멘트 없이 시민 한두 명의 의견만 전달했다. 너무 차갑다는 느낌마저 갖게 되는 NHK의 보도 태도와 KBS의 편향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공영방송이 가야 할 길인지는 분명해진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침착함을 유지하고 언론의 정도를 걷는 것이 공영방송 종사자라면 기본 상식이다. 더구나 국가적으로 어려울 때 공영방송이 국가 통합에 기여해야지, 사회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국민에게 운영 방향 물어야▼
방송의 편향성 문제 말고도 KBS는 저질 선정성, 얼마 전 드러난 PD의 부도덕 사례 등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여러 문제가 중첩되어 어떤 게 KBS의 진짜 얼굴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권력 이동에 따라 너무 쉽게 흔들리는 내부시스템도 큰 문제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수술이 요구된다. 그 원칙은 ‘정권의 방송’에서 ‘국민의 방송’으로 되돌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방송의 영향력이 날로 막대해지고 있는 마당에 KBS가 가야 할 길을 KBS 사장 혼자서 정할 수는 없다. 공영방송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놓고 큰 틀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룰 필요가 있다. 주인인 국민의 뜻을 물어보고 그 의향에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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