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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22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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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준비 기간 16년, 제작 기간 1년.
무슨 사연 많은 대작 영화의 후일담 같은 이 수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임권택 감독과 가진 인터뷰를 묶은 책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에 들인 시간이다.
‘씨받이’ 제작 직후 임권택을 만난 스물일곱살의 패기만만한 영화청년 정성일은 1520분 동안 인터뷰한 끝에 ‘한국영화 연구 1·임권택’이란 책을 냈다. 16년 후 정성일은 직업 영화평론가로서 다시 한번 임권택의 영화에 도전한다. 그는 영상자료원에 보관된 임권택 감독의 62편의 영화(유실된 것을 제외한 전부)를 일일이 다시 보고 1년여 동안 매주 이틀씩 임권택을 따로 만나 64시간 동안 대담을 했다. 모두 합쳐 1200쪽이 넘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2권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분량과 밀도 면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방대하고 치열하다. 오래된 영화의 특정 장면을 거론하며 상세히 영화의 미학을 ‘이론적으로’ 파고드는 정성일에게 임권택은 늘 한결같이 실사구시의 태도로 응한다. 임권택의 말투는 어눌하지만 소박한 그의 답변에 정성일은 곧잘 한방 먹는다. 척박한 역사 속에서 결국은 자기 영화의 미학을 발명한 임권택의 행보를 가리켜 정성일이 ‘역사 속 자아의 슬로모션’이란 멋진 표현으로 정의를 내리면 임권택은 “나는 느지막이 간다는 생각은 없었어요”라고 응수한다. 화면 사이즈 연출에 대한 정성일의 평가 뒤에 임권택은 “나는 클로즈업을 굉장히 위험한 사이즈로 알고 있는 연출자요. 그 클로즈업을 소화해서 표현해내야 할 연기가 채워지지 못했을 적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고…”라고 담담하게 대답한다. 임권택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담고 싶은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형식을 고민하는 감독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의 영화세계를 일군 비밀이다.
좌익운동에 가담해 몰락한 집안의 후손이었고, 먹고 살기 위해 영화판에 들어온 임권택에게 독재정권과 전근대적 영화산업의 현실은 넘어서기보다는 그저 감당해내야만 하는 벽이었다. 무엇보다 영화는 임권택에게 직업이었다. 그는 이 직업으로 과연 먹고 살 수 있겠는가라는 생존의 두려움을 감당하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자신과 세상에 정직한 영화를 찍었으며, 1980년대 이후 자신의 영화미학 체계를 꾸렸다. 임권택의 영화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곧 한 예술가의 성장과정이자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는 노감독의 예술세계에 대한 한 평론가의 헌사이다. 감독의 무의식까지 파고들어 역사의 지층까지 끄집어내려 한 이 비평가의 맹렬한 노력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필름 2.0’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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