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한국영화, 스크린서 '여자'들이 사라진다

  • 입력 2002년 12월 30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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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영화가 그려낸 판타지에서는, 결혼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단죄가 끊이지 않았다. 낙태한 여성들을 공격하는 스릴러 영화 ‘하얀방’의 한 장면.

2002년 한국영화가 그려낸 판타지에서는, 결혼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여성의 욕망에 대한 단죄가 끊이지 않았다. 낙태한 여성들을 공격하는 스릴러 영화 ‘하얀방’의 한 장면.

아주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이 땅의 여성들은 스크린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99년과 2000년 대한민국 흥행의 역사를 새로 쓴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등 두 영화 모두의 여주인공은 이 땅이 아닌 어떤 곳, 북한 혹은 중립국에서 날아들었다.

그 후로도 여성들은 계속 수입되었다. 삼류 깡패인 강재에게 ‘파이란’의 중국 여자는 먼 나라에서 온 구원의 여신이다. 그 후 이상하게 이어지는 할머니의 행렬. 사랑 혹은 구원을 아는 자로서 늙은 여자는 ‘집으로…’의 넉넉함으로, ‘봄날은 간다’ 할머니의 정결함으로, 그리고 최근 ‘죽어도 좋아’의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젊은 여성들과 자리를 뒤바꾼다.

그러면 지금 여기, 21세기를 살아가는 남한의 젊은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2002년 스크린 속에서 젊은 여성들의 육체는 처참한 몰골로 판타지의 거울에 투사되고 있다.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유산 혹은 낙태의 사건을 빌어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얀 방’에서 혼전임신 때문에 구타를 당하는 여자의 모습, ‘H’에서 미혼모의 몸으로 버스를 탔다가 죽임을 당한 여인, 이윽고 군인들의 공동의 씨받이가 된 여주인공이 마취제도 없이 군인들에 의해 강제 유산을 당하는 ‘해안선’의 설정은 모두 ‘자궁 공포증’이라 불러도 좋을, 여성의 육체에 대한 가학의 징후다. 그들은 적과의 동침을 감행했고 아비가 없는 아이를 가졌다. 내 한 몸 고이 지켜 가문(家門)안에서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하는 ‘가문의 영광’이 재현하는 순결 이데올로기는 ‘자궁 공포증’에 물든 다른 영화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사실 여성들이 순결했을 때, 이국에서 몰려들었을 때, 할머니라는 안전한 타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임신과 낙태라는 이슈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들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낙태를 선택한 올해 판타지 영화 속 여성들은 ‘자궁 공포증’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의 욕망은 심지어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처럼 낮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방에서 깨가 쏟아지는 생활을 하고 밤에는 부를 보장해주는 법적인 남편과 안락한 생활을 하는 중혼의 형태마저 선보이고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엿보이는 지금 여기 여성들의 욕망을 ‘자궁 공포증’에 이식해 보자. 여주인공 연희(엄정화)의 욕망대로라면 가문의 영광이 재현되기는커녕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두 사내의 정자가 한 자궁에서 섞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친 짓을 지나 수컷들에겐 악몽의 시나리오다.

올해 한국 영화의 자궁 공포증은 순결 이데올로기가 파괴된 자리에 피어난 독버섯과 같다. 그 곳에는 여성들이 ‘색즉시공’처럼 낙태나 유산을 해도 너그러운 남자, 너그러움이 거의 마조히즘에 가까운 남자를 바라는 시대, 남성들의 요동치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동시에 그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 2002년이 변화하는 여성들의 욕망과 변화하지 않는 남성들의 욕망에 교집합이 거의 없었던 시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처럼 이 땅의 여성들이 결혼의 전복보다 그 안에서 대안을 모색하려 하는 한, 한국 영화 속의 자궁공포증과 그 충돌의 불협화음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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