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영화감독 3인과 만남]홍상수-차이밍량-이시이 소고

  • 입력 2000년 3월 13일 19시 25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제작은 다른 분야에 비해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주류의 화법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업적으로 꽤나 위험한 행위다.

그런데도 기승전결의 줄거리와 스타 배우에 기대는 고전적인 영화제작 방식을 거부한 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아시아 영화감독 세 명이 한데 모여 화제가 되고 있다.

12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일상과 이탈-아시아 감독 3인전’에서 만난 한국의 홍상수(‘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대만의 차이밍량(‘하류’ ‘구멍’), 일본의 이시이 소고(‘꿈의 미로’ ‘셔플’) 감독.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검은 색 옷차림이었지만 표정은 다 달랐다. 시종일관 유쾌한 차이밍량 감독에 비해 홍상수 감독은 최근 촬영이 끝난 ‘오, 수정!’의 후반작업을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방금 홍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고 온 이시이 소고 감독은 “영화가 아주 무겁다”며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다.

세 명의 영화의 공통점에 대해 차이밍량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줄거리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일상생활 속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영화들”이라며 “관객이 우리들의 영화를 보면 ‘저것도 영화인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들은 답답하고 비루한 일상 또는 삶에 대한 불만을 거칠게 터뜨리는 파괴와 폭주에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차갑게 느끼도록 만든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삶과 영화가 꼭 1대1로 대응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삶 속에서 영화의 소재를 얻는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더 많이 아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자학적일 정도로 스스로를 들들 볶는 편이고, 영화를 통해서도 ‘이 정도로 추한 꼴을 보고도 넌 세상을 좋아하니?’ 하고 관객에게 묻고 싶다.”(홍상수)

“내 영화가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마음 속에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찍는다.”(이시이 소고)

세계를 제패한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이들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어떤 영화든 모두 수용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보통의 감독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영화를 만드는 건 과연 어떤 일일까?

홍상수 감독은 “달리기 선수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전력투구하다보면 어느새 가야 할 곳에 가 있고, 굳이 남들보다 빨리 가지 않아도 좋은 느낌이라는 것.

차이밍량 감독은 “자유로운 영화를 만드는 일은 적막한 작업이지만 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며 “가야할 길이 멀고 힘들지만, 10년 안에 만들고 싶은 영화를 천천히 다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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