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개국35돌]학자-관계자가 말하는 동아방송

  • 입력 1998년 4월 24일 19시 49분


▼강현두(康賢斗·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60년대는 라디오라는 매체가 상업적으로 혹은 독립된 언론매체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시기였다. 동아방송은 이 무렵 처음부터 철저한 뉴스미디어, 저널리즘의 연장이란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국내 다른 라디오방송과 달리 ‘전파언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현대사가 얼마나 굴절된 것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오택섭(吳澤燮·고려대 언론대학원장)〓동아방송은 당시 유일한 대안적인 매체였다. 바른 뉴스와 비판적인 보도프로그램으로 각인 된 동아방송은 상업적인 성향이 매우 적었다. 정론지(正論紙) 동아일보에 비견되는 동아방송은 ‘정음(正音)방송’이었다. 법률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80년 강압적인 조치로 폐국된 것은 원천적으로 원인무효라고 생각한다. 새정부하에서 방송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이 기대되는데 ‘정음방송’ 동아방송의 맥이 이어질 수 있는 조치가 있기를 바란다.

▼유재천(劉載天·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방송사상 동아방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동아방송은 민간방송의 처지에서, 그것도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뉴스를 과감하게 전달해 주었다. 민주화를 위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고 결국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한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80년 신군부가 ‘공영방송’체제라는 이름아래 동아방송을 강제로 폐국해버린 것도 동아방송이 ‘민주방송’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효성(李孝成·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교수)〓‘동아방송’하면 첫 인상은 언론의 비판 감시기능을 잘 수행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후 다른 방송이 보도 기능을 수행했지만 권력층의 입맛에 드는 뉴스에 치중해 ‘정권의 나팔수’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동아방송은 다른 언론기관이 권력의 억압으로 위축돼 있을 때 정권의 대변인이기를 거부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폐국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전영우(全英雨·수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아나운서담당부국장겸 해설위원으로 있다가 강제폐국을 맞은 날 동료들과 흘렸던 비통한 눈물과 침통한 분위기는 잊을 수 없다. 한국 최초, 최고의 토크쇼 프로라고 평가받은 ‘유쾌한 응접실’ 사회자로 고 양주동(梁柱東)박사 등 뛰어난 분들과 함께 했던 시절은 인생의 황금기였다. ‘DBS 정오 뉴스’는 수도권 청취자들의 귀를 사로잡았고 60년대 중반 유류 절감을 위해 벌였던 ‘걸어서 가자’라는 캠페인은 라디오 캠페인의 효시였다.

▼이숙영(李淑英·프리랜서 아나운서)〓80년11월30일 자정 동아방송의 마지막 고별방송을 했던 일이 엊그제 같다. 당시 신군부는 고참사원들이 못미더웠던지 입사한지 1년밖에 안된 나에게 고별방송을 시켰다. 대학시절 김세원씨가 진행하던 ‘밤의 플랫폼’을 애청했던 일이 생각난다. 역사가 언젠가는 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은 방송, 사랑받는 방송’이었던 동아방송 폐국이 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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