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공산품에 인공지능(AI)이 기본으로 탑재되면서 신제품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자동차, 노트북, 냉장고, 세탁기 등 대부분 제품이 AI가 탑재된 뒤 가격이 상승하는, 이른바 ‘AI플레이션(AI+인플레이션)’ 시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원가 10배 뛰는 고레벨 자율주행차
AI플레이션이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산업 중 하나가 자동차다.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의 확산과 자율주행, AI 적용으로 차량 한 대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절대량이 늘고 있다. 특히 자율주행 단계가 높아질수록 필요한 반도체 양이 늘고, 수요 증가에 따라 반도체 단가가 같이 오르게 된다.
21일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PwC에 따르면 충돌 방지와 차선 이탈 방지 등 운전자 보조 기능을 제공하는 자율주행 레벨 0~1 차량의 반도체 원가는 500달러 이하다. 반면 운전자 개입 없이 스스로 주행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레벨 4 이상의 자율주행차는 반도체 원가가 5000달러 이상으로 약 10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자동차 업계에선 이미 AI 도입에 따라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출시된 현대자동차 팰리세이드는 2025년형 신모델인 ‘디 올 뉴 팰리세이드’에서 AI 어시스턴트 기능이 최하위 세부옵션(트림)부터 기본 적용됐다. “에어컨 틀어줘” 등 음성을 인식하고 수행하는 기능이다.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도 업그레이드됐다.
이들 기능이 추가되면서 디 올 뉴 팰리세이드는 직전 모델인 2024년형 대비 최하위 트림은 600만 원, 최상위 트림은 700만 원 가량 가격이 상승했다. 그 직전 모델인 2022년형 대비 2024년형 모델 가격이 300만~400만 원 인상된 것과 비교하면 가격 인상 폭이 크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가 전자화되면서 차량용 부품에도 반도체가 다수 들어가고 있고, 이들 부품의 원가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1년 만에 25% 오른 노트북 가격
전자제품이 AI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선 더 많은 메모리 반도체와 센서 등이 필요하다. 심지어 삼성전자는 신제품 4억 대 등 총 8억 대의 삼성 제품에 AI를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AI플레이션 가속화가 예상되는 이유다.
올해 들어 노트북 가격은 잇달아 올랐다. 삼성전자, LG전자 모두 전년 출시 모델과 비슷한 사양의 신제품 가격을 20% 안팎으로 올렸다. 삼성전자가 오는 27일 출시할 갤럭시북6 시리즈의 가격은 351만 원(메모리 32GB·SSD 1TB ·16인치 기준)이다. 갤럭시북 프로 모델의 출고가가 300만 원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출시된 비슷한 사양의 제품 가격이 280만80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4.9% 오른 것이다.
LG전자도 이달 초 생성형 AI를 적용한 2026년형 LG 그램을 공개했는데, 16인치 제품 출고가(메모리 16GB, SSD 512GB)가 314만원이었다. 지난해 동급 대비 약 50만원 인상됐다. 해외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델은 지난해 12월부터 주요 제품 가격을 15~20% 인상했다.
TV, 로봇청소기, 냉장고 등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기존 가전도 ‘AI화’에 따른 가격 인상이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이달 열린 ‘CES 2026’에서 구글의 생성형 AI 제미나이를 탑재한 냉장고 비스포크 AI 패밀리허브를 공개했다. 올해 나오는 130형 마이크로 적녹청(RGB) TV는 사용자와 상호 작용하는 TV 전용 AI 플랫폼 ‘비전 AI 컴패니언’을 탑재하기도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가전 제품의 AI화는 제품의 ‘프리미엄화’를 통해 가격을 올릴 수 있는 명분”이라며 “다만 불황에는 소비자들이 AI 명찰을 단 값비싼 가전보다 가성비 제품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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