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한 맥주만 400종, 인스타 팔로워 수 16만? 그런데 양조장이 없다고? [브랜더쿠]

  • 인터비즈
  • 입력 2023년 12월 27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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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하면 많은 사람이 독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독일 외에도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유니크한 맥주에 관한 역사가 있다. 오늘 소개할 스웨덴 역시 1000년에 걸친 맥주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도 스웨덴 맥주 시장에선 마을별로 다양한 수제맥주 양조장이 경합을 벌이는 중이다. 그중 현지에서 소규모 맥주 브랜딩의 모범 사례로 빠짐없이 언급되는 브루어리가 있다. 2010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작한 '옴니폴로'다.

양조사 헤녹 펜티와 그래픽 아티스트 칼 그랜딘이 공동 창업한 옴니폴로는 태생부터 독특하다. 양조 시설 하나 없이 400여 개 맥주를 출시하며 명성을 쌓아왔기 때문. 초콜릿 케이크, 아이스크림 와플, 요거트 음료 맛처럼 누가 먹을까 싶은 엉뚱한 맥주들을 선보이지만 현재 미국, 캐나다, 독일 등 40여 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양조장이 됐다. 캔맥주와 양조 과정만 간단히 찍어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의 팔로워 수는 무려 16만 명을 넘어섰다. 이 브루어리, 대체 왜 인기인걸까?

옴니폴로의 다양한 맥주 라인업_출처: Omnipollo
옴니폴로의 다양한 맥주 라인업_출처: Omnipollo


내 머릿속이 곧 양조장
두 공동 창업자는 진부한 스웨덴 맥주 시장에 새로움을 불어넣겠다는 각오로 2010년 옴니폴로를 창업했다. 제조방법부터 파격적이었다. 이들의 선택은 양조장 없이 맥주를 만드는 이른바 ‘집시 양조(gypsy brewing)’. 명칭 그대로 집시처럼 여러 양조장을 떠돌면서 맥주를 생산하는 방식이다. 자체 양조 기술과 레시피를 갖고 있지만 설비가 부재했기 때문에 대여 비용을 내고 다른 양조장을 활용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스웨덴 맥주 업계에서 통용되는 방식은 아니었다. 설비를 빌려준다는 건 그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인데 신생 수제맥주 브랜드 입장에선 기존 양조장들이 인정할 만한 전문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에 옴니폴로의 경우 창업 전 여러 브루어리에서 양조를 전담한 헤녹의 이력 덕분에 양조장들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옴니폴로는 헤녹이 홈 브루잉에서 개발한 레시피로 여러 맥주를 출시하며 스웨덴의 집시 양조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다. 덴마크의 투올, 네덜란드의 드몰렌, 미국의 더 베일 등 전 세계 유명 양조장들과의 집시 협업은 신생 브랜드인 옴니폴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옴니폴로가 집시양조 과정에서 촬영한 브루어리들 사진_출처: Omnipollo
옴니폴로가 집시양조 과정에서 촬영한 브루어리들 사진_출처: Omnipollo


집시 양조 더 파보기

✔국내에서도 집시 양조가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끽비어컴퍼니, 서울집시 등 집시 양조로 시작해 유명해진 국내 브루어리들이 한 예다. 해외 시장처럼 A브랜드가 B양조장을 대여하는 경우, 제품 상세표기란의 제조사 칸에만 B양조장이 기재될 뿐 제품명은 A브랜드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자사 로고나 브랜드명을 제품명에 반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집시 양조는 수천 만원에서 수억 원대 초기 투자금이 필요한 부지 마련, 양조장 공사, 설비 구축을 생략하고 맥주를 출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주류 제조 면허 취득, 세금 계산 등 부가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맥주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집시 양조의 단점은 없을까?

창업 초기 단계인 수제맥주 브랜드에게 유용한 방법이지만, 업계 인맥과 맥주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면 시도하기 쉽지 않다. 서로 깊은 신뢰 관계가 없으면 설비 대여가 어렵고, 빌린다고 해도 브랜드 내부에 이를 관리할 전문 양조사가 상주해야 한다. 복잡하게 연결된 브루어리의 특성상 전문가 없이 한 번만 잘못 작동시켜도 양조 시설 전체가 파손돼 막대한 보상 비용을 부담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맥주, 먹어본 적 없을걸?
독특한 레시피도 창업 초반 옴니폴로가 여러 양조장과의 협업을 성사시키는 데 한 몫했다. 옴니폴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맛’의 맥주를 만들겠다며 양조장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시장에서 최초가 될 만한 제품을 완성할 테니 출시 후 공동 제조사로서 함께 브랜드를 알리자고 양조장을 설득한 것. 실제 옴니폴로는 홉과 맥아 등 일정 재료의 함량을 높이거나 수제맥주에서 자주 쓰이는 과일과 견과류 등을 조합하는 업계 관행을 따르지 않고, 일반적으로 맥주와 곁들여 먹지 않는 음식들의 맛을 차용했다. 해녹이 유년 시절 자신의 장래희망이었던 제빵사를 맥주에 투영해 만든 ‘노아 피칸 머드 케이크’ 맛이 대표적이다. 해당 제품은 청량하고 쌉싸름한 맥주 맛의 전형적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 알코올 도수가 11%에 이르는 임페리얼 스타우트 종류임에도 초콜릿 케이크와 피칸 파이에서 느낄 법한 진한 달콤함과 걸쭉한 질감이 돋보인다. 이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맥주 리뷰 커뮤니티 RateBeer가 선정한 '2016 전세계 최고의 맥주 TOP 20'에 오르기도 했다. 요즘에도 한국의 수제맥주 펍과 보틀샵에서는 입고될 때마다 빠르게 품절될 정도로 핫한 베스트셀러다. 옴니폴로의 노아 피칸 머드 케이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다른 양조장들도 앞다퉈 걸쭉하고 달콤한 스타우트를 출시했고, 그 결과 피칸 머드 케이크 맛은 ‘페이스트리 스타우트’라는 하나의 맥주 종류가 됐다. 이외에도 인도의 요거트 음료인 라씨와 산미가 높은 독일의 고제 맥주*를 결합한 ‘비앙카 망고 라씨’ 고제, 마시멜로와 코코아닙스로 단 맛을 높인 ‘오리지널 록키 로드 아이스크림’, 메이플 시럽과 트러플 등으로 와플 맛을 구현한 ‘오리지널 메이플 트러플 아이스크림 와플’ 등 그간 옴니폴로는 400여 가지 실험적인 맛을 내놨다.

*독일 고슬라 지방에 위치한 고제강의 물로 만든 밀맥주로 약간의 짠맛이 특징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1) 노아 피칸 머드 케이크, 2) 비앙카 망고 라씨, 3) 오리지널 록키 로드 아이스크림, 4) 오리지널 메이플 트러플 아이스크림 와플_출처: Omnipollo
왼쪽부터 순서대로 1) 노아 피칸 머드 케이크, 2) 비앙카 망고 라씨, 3) 오리지널 록키 로드 아이스크림, 4) 오리지널 메이플 트러플 아이스크림 와플_출처: Omnipollo

그렇다고 특이한 맛으로만 승부한 건 아니다. 맥주 덕후들에 따르면 상상해본 적 없는 맛이지만 먹어보면 조화로운 것이 옴니폴로 맥주의 특징이다. 실제 노아 피칸 머드 케이크 외에도 여러 옴니폴로 맥주는 그동안 국제맥주대회에서 수상하며 그 기발한 맛을 인정받았다. 영화로 치면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은 셈이다.

기괴하지만 예술로 인정받는 패키지
옴니폴로는 공동 창업자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칼 그랜딘이 제작한 패키지로도 유명하다. 대게 수제맥주라고 하면 패키지에 양조장 로고가 부각되기 마련인데, 옴니폴로 맥주에선 대부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제품명이 적혀 있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와 관련해 칼은 “로고와 제품명은 오히려 수제맥주가 주목받는 것을 방해하는 짜증나는 요소”라고 밝힌 바 있다.

옴니폴로의 패키지 아트워크 제작 현장_출처: Omnipollo
옴니폴로의 패키지 아트워크 제작 현장_출처: Omnipollo


로고와 제품명 대신에 옴니폴로 맥주에는 기괴한 그래픽이 자리한다. 거대하게 표현된 눈알, 섬뜩한 미소, 끝없이 반복되는 그래픽 패턴 등이 일례다. 마냥 엉뚱한 디자인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기획의도가 이를 관통한다. 바로 맥주 맛을 상징한다는 것! 블루베리를 오랜 시간 우려내서 강렬한 과일 향이 느껴지는 논알코올 맥주 '블라바스오파(Blabärssoppa)' 캔에는 식인 식물처럼 보이는 대형 꽃잎과 블루베리의 보라색을 강조했다. 아메리칸 페일 에일치곤 도수가 낮아서 전 세계 많은 이가 마실 수 있다는 뜻의 '풀 어스(Full Earth)'에는 지구본을 형상화한 일러스트 위에 노란색 폰트로 알코올 도수를 적었다.

옴니폴로는 패키지 디자인으로 사회 운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2017년 영국의 벅스턴 브루어리와 공동 제조한 'Yellow Belly(겁쟁이)'는 당시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힘을 보탰다. 작은 눈동자 2개만 점처럼 찍힌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패키지는 집단 뒤에 숨어서 인종 차별에 동조하는 이들을 비꼰 디자인이다. 이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디자인은 진열대 위 수많은 맥주 사이에서 옴니폴로로 손길이 갈 확률을 높인다.
Yellow Belly 맥주 패키지_출처: Omnipollo
Yellow Belly 맥주 패키지_출처: Omnipollo


교회에서 열리는 맥주 파티?
론칭 후 10년간 스웨덴 맥주 시장의 집시 양조 대표주자로 불리던 옴니폴로는 2020년 자체 양조장을 설립했다. 소비자들에게 맥주 제조 현장을 생생하게 공유하는 파티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장소는 스톡홀름 순드비베르그(Sundbyberg) 마을의 방치됐던 교회. 외관부터 이색적인 양조장을 만들고 싶던 옴니폴로에겐 최적의 건물이었다. 이들은 설비 공간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기본 구조를 최대한 유지한 채 건물 곳곳에 칼이 디자인한 네온 조명과 일러스트 벽화 등을 비치했다. 장엄한 교회 인테리어와 대비되는 생산 시스템, 장식물들은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교회 폐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옴니폴로 양조장_출처: Omnipollo
교회 폐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옴니폴로 양조장_출처: Omnipollo


이곳에서 열리는 브루어리 투어는 옴니폴로 팬들 사이에서 인기다. 가장 핫한 장소는 2층으로 설계된 교회 중앙 홀에 위치한 맥주 생산 시설. 양 옆으로 나열된 맥주 발효통 사이는 포토존으로 쓰인다.

옴니폴로는 양조장을 맥주 펍으로도 활용한다. 양조 시설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에서 자사의 인기 상품 10여 종과 함께 햄버거, 핫도그 등을 판매한다. 발효부터 맥주 병입 과정까지 전체적인 양조 과정을 보며 옴니폴로의 가장 신선한 맥주를 맛볼 수 있기에 맥주 덕후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꼽힌다.

스웨덴에서 전례없는 제조방식, 맛, 디자인, 양조장으로 승부한 옴니폴로. 재미없어 질 바엔 브루어리 문을 닫겠다는 극단적인 사명에서 엿보이는 엉뚱함이 곧 이 브루어리가 두터운 팬덤을 쌓은 비결이다.

*해당 글은 국내 최초 논알콜 수제맥주 전문 양조장 '부족한녀석들'을 설립한 황지혜 대표의 연재물 <수제맥주 비하인드 씬> 5편입니다.

인터비즈 이한규 기자 hanq@donga.com
#브랜더쿠#수제맥주#옴니폴로#브랜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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