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사 기사 일을 배워 4년 전 서울 중구 명보아트시네마(옛 명보극장)에 계약직으로 재취업한 이장원 씨(위쪽 사진)는
자신의 능력을 살려 일하는 ‘현역 노인’이다. 실버 택배 기사 이석우(가명) 씨는 배송할 택배를 전동 카트에 실으며 “그나마 이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경제 kjk5873@donga.com·안철민 기자
“동 호수 잘 봐요. 안 그러면 사고 나요.”
지난달 20일 경기 성남시의 한 노인복지관 주차장. 간이 천막 아래에서 노인 9명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들은 복지관 바로 옆 2300여 채 규모의 아파트 단지로 택배를 배송하는 ‘실버 택배 기사’들로 모두 60, 70대다. 택배 물건 하나를 배송하면 350원을 번다. 주 6일 근무를 해도 월급은 40만 원 정도다.
이들이 20대도 벅차다는 고된 택배 일을 시작한 사연에는 퇴직 후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내몰리는 한국 노인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 한국인이 구직시장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평균 나이는 72.9세(남성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취재팀은 지난 1개월간 많은 일하는 노인들을 만났다.
○ 일을 ‘해야만’ 하는 노인
“이 나이까지 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김성모(가명·65) 씨는 2015년 3월부터 실버 택배 기사로 일했다. 실버 택배 기사 9명 중 경력이 가장 길다. 그는 젊은 시절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두 자녀를 키우고 결혼까지 시켰다. 하지만 은퇴 후 기댈 건 매달 나오는 연금 80만 원뿐이었다. 빠듯한 살림에 다시 일을 구했지만 60세가 넘은 그를 써 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운 좋게 복지관의 소개로 택배 일을 시작한 김 씨는 “동료들과 일하는 건 생활의 활력소가 되지만 돈만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며 “택배 분실 사고가 나 보상을 해 주면 월급이 더 줄어든다. 미리 노후 대비를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라고 씁쓸해했다.
동료 이석우(가명·70) 씨는 연금과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합치면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가 일을 시작한 건 아내와 사별한 뒤 술에 의존하며 보냈던 자신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이 씨는 “일을 하면서 혼자라는 고립감을 떨쳐내는 데 도움이 됐다”며 “다만 몸이 마음처럼 안 따라줘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 일이 ‘즐거운’ 노인
취재팀이 만난 노인 중에는 드물지만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은 경우도 있었다. 서울 중구 명보아트시네마에서 디지털 영사기사로 일하는 이장원 씨(74)는 하루 7시간 일한다. 이틀 일하고 이틀 쉬기 때문에 월급은 100만 원 정도. 하지만 이 씨에게 일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행복과 보람 그 자체다.
그는 1964년부터 필름 영사기사로 일하다 2011년 은퇴했다. 25평대 아파트, 연금과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합친 월수입은 250여만 원. 넉넉한 편이지만 집에서 쉬기만 하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2013년 서울 약수노인종합복지관의 도움을 받아 디지털 영사기사로 재취업했다.
급여를 떠나 적성을 살려 원하는 일을 하며 노후를 보내는 이 씨는 많은 노인이 꿈꾸는 ‘현역 노인’에 가장 가깝다. 그는 “기술이 없어 전단지 돌리는 노인도 많은데 난 운이 좋다”라며 “개인 특성에 맞는 노인 일자리를 찾아 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노인 일자리냐, 복지냐 이것이 문제로다
노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 동아일보 취재팀은 50대 이상 전국 성인 남녀 300명에게 고령화 시대에 꼭 필요한 정책을 주관식으로 물었다.
그 결과 예상과 달리 노인 복지 확대보다는 일자리 확대를 주문한 사람이 111명(37%)으로 가장 많았다. 노인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데다 그 일자리마저 급여가 너무 적거나 단순 업무가 대부분인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연금 인상, 의료비 지원 확대와 같은 ‘노인 복지 확대’를 꼽은 사람은 110명(36.7%)이었다. 노인 일자리와 복지 확대가 모두 필요하다는 답변은 19명(6.3%)이었다. 노인 연령 기준 상향을 반대하는 데에는 퇴직 후 연금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벅찬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인 연령을 올리면 연금 받는 시기가 늦어져 빈곤이 심화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노인 연령 기준 상향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 초 일본 노년학회와 노년의학회는 노인 기준을 65세에서 75세 이상으로 올릴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다. 미국과 독일은 65세인 연금 수급 시기를 67세로 단계적으로 늦추고 있다.
김동배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 연령 기준 상향 논의의 핵심은 노후 소득을 어떻게 보장해 주느냐다. 연금을 더 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임금은 덜 받아도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자리 정책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일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 시스템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경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인구정책연구실장은 “노인 연령을 높일지 말지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노인 삶의 질을 높이면서도 사회 부담이 크게 늘지 않는 균형점을 찾는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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