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와 대공황 논했던 천재소년 ‘제2 대공황’ 막고 출구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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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심층 포커스]지구촌 경제 ‘소방수’ 버냉키 시대가 저문다

벤 버냉키. 아직은 세계 시장을 움직이기 충분한 이름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미국은 물론이고 신흥국의 시장이 요동을 친다. 2006년 2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에 오른 뒤 지금까지 그렇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내년 1월 말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그 대신 후임자를 지명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버냉키 의장도 물러나겠다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는 지난달 미국 와이오밍 주 잭슨홀에서 세계 중앙은행 관계자가 모여 경제 전반을 논의하는 회의에 불참했다. 잭슨홀 회의장은 그가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금리 인하로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을 때 국채 매입 등으로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직접 돈을 푸는 정책)와 제로 금리 등의 대규모 경기 부양 정책을 밝혔던 곳. 그는 등판을 회피한 투수처럼 비쳤다.

그는 요즘 전임자였던 앨런 그린스펀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19년간 최장수 연준 의장을 지냈던 그린스펀은 임기 말에 잭슨홀과 같은 회의에서 재임 기간의 치적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그런 뒤 미국은 금융위기를 맞아 대공황 이후 가장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그린스펀의 말로를 봐서인지 버냉키의 행보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워 보인다.

여기에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는 연준의 정책이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버냉키의 뒤를 주시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무난하게 수습했다는 평가가 언제까지 유효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계는 버냉키가 없는 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헬리콥터 벤’

‘경제위기 소방수’ 벤 버냉키의 공세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마치 그가 헬기를 타고 달러를 마구 뿌리는 모습으로 풍자한 만화. ‘헬리콥터 벤’이란 제목의 이 풍자만화는 웹 디자인 및 그래픽 전문 업체인 블루와이어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출처 블루와이어 스튜디오
‘경제위기 소방수’ 벤 버냉키의 공세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마치 그가 헬기를 타고 달러를 마구 뿌리는 모습으로 풍자한 만화. ‘헬리콥터 벤’이란 제목의 이 풍자만화는 웹 디자인 및 그래픽 전문 업체인 블루와이어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출처 블루와이어 스튜디오
2002년 11월 21일 미국 워싱턴의 전미경제학자클럽(NEC). 얌전한 인상의 대머리 중년 남자가 연사로 나섰다. 3개월 전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신임 이사가 된 ‘대공황 전문가’ 벤 버냉키 프린스턴대 교수였다.

한 참가자가 질문했다. “미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면 어쩌죠.” 버냉키가 답했다. “인구, 생산성 등을 감안할 때 미국이 일본식 장기불황을 겪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설사 그런 위기가 와도 밀턴 프리드먼의 말처럼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듯’ 연준이 강력한 통화완화 정책을 단행하면 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 발언으로 버냉키는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고 유명 인사가 됐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가 물가 안정이라 믿는 상당수 전문가와는 달리 경기 부양, 즉 디플레이션 파이터(Deflation Fighter)의 역할을 강조한 그의 발언은 파격이었다.

파격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던 버냉키는 2008년 9월 금융위기 당시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는 양적완화 정책으로 세계 경제의 파국을 막았다.

일각에서는 버냉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을 조기에 감지하지 못해 금융위기를 방조했다는 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위기 대처 방법은 대체로 호평을 받고 있다.

버냉키는 어릴 때 천재 소년이었다. 1953년 미국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미국 대학 입학시험인 수학능력적성검사(SAT)에서 1600점 만점에 1590점을 받아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때도 최우수 논문상 ‘수마 쿰 라우데(Suma Cum Laude)’를 받았다.

1921년 미국 땅을 밟은 그의 조부 조너스는 똑똑한 손자와 대공황에 대해 토론했다. 버냉키는 ‘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대공황을 방지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였고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이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논문 주제는 ‘대공황의 시사점’이었다.

당시 버냉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통화주의 학파의 거두이자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 버냉키는 대공황의 원인이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연준의 과도한 통화 긴축 정책에 있었다는 프리드먼의 이론에 매료됐다. 약간의 물가 상승을 감수하더라도 중앙은행이 통화량 확대를 통해 경기 침체를 적극 막아야 한다는 프리드먼의 이론도 버냉키가 연준 의장이 된 이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79년 불과 26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버냉키는 스탠퍼드 프린스턴 등 미국 명문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20년 넘게 학교에서만 지내던 버냉키는 2002년 8월 연준 이사가 된 이후 미국 사회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혹독한 신고식과 금융위기의 먹구름

2006년 2월 연준 의장에 취임한 버냉키의 초반은 험난했다. 특히 ‘상아탑에 갇힌 유약한 학자’ 이미지인 그와 막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한 전임자 그린스펀이 비교될 때 어려움이 겹쳤다.

워싱턴 정치에 익숙했던 노회한 그린스펀은 의도적으로 모호한 화법을 사용하며 ‘신비주의 통화정책’을 구사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거품이 걷히던 1996년 11월 “주가 상승이 과하다”라는 직설적인 말 대신 “시장에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 나타났다”고 언급한 게 대표적이다. 반면 버냉키는 수사가 없는 평이한 화법을 사용했다. 그가 전임자에 비해 정치적 감각과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증폭됐다.

경제 전문방송 CNBC의 스타 앵커 마리아 바티로모와의 설화(舌禍)는 그에 대한 불안을 더 키웠다. 2006년 4월 버냉키는 의회 증언에서 ‘금리 인상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4월 29일 백악관 만찬에서 그를 만난 바티로모는 질문 공세를 퍼부어 버냉키로부터 “시장이 금리 인상에 관한 나의 의회 발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얻어냈다. 바티로모가 기세등등하게 이를 보도한 2006년 5월 1일 세계 주식시장은 일제히 하락했다. 버냉키는 ‘연준의 신뢰를 손상시켰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의사소통은 공식 통로로만 하겠다”며 사과했다.

그가 금융위기의 선제 대응에 실패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2000년대 초중반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은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9·11테러가 발생한 2001년 6.5%에 달하던 미국의 기준금리를 그린스펀은 불과 2년 만에 1.0%까지 끌어내렸다. 시장은 이를 ‘그린스펀 풋(put)’이라 불렀다. 파생 상품의 한 종류인 풋 옵션처럼 주가가 하락할 때마다 그린스펀이 금리를 내려 주가 반등을 뒷받침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랜 저금리 정책과 유동성 과잉은 ‘거품 경제’라는 독버섯을 키웠다. 경고음은 2007년 울렸다. 4월 미국 2위 모기지업체인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 보호를 신청한 것. 연준이 넘쳐나는 유동성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버냉키는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라며 이를 묵살했다. 이 기록은 올해 1월 공개된 2007년 6월 공개시장위원회(FOMC·미국의 기준금리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1년에 8번 열리는 연준의 통화정책 회의) 의사록에 남아 있다. 결국 약 1년 뒤인 2008년 9월 15일 자산 2000억 달러(약 220조 원)가 넘는 초대형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며 초유의 금융위기가 발생한다.
무지막지한 특급 소방수

초기 대응은 늦었지만 대공황 전문가 버냉키의 진가는 이때부터 나타났다. 핵심은 바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양적완화. 버냉키는 이미 낮은 수준이던 미국의 기준금리를 더 내릴 수도 없는 제로(0)까지 낮춰도 소비 및 투자 증가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2008년 3월부터 현재까지 세 차례의 양적완화를 통해 무려 3조 달러가 넘는 돈을 풀었다.

연준은 2008년 11월부터 2010년 3월에 끝난 1차 양적완화 때 1조7000억 달러, 2010년 11월부터 2011년 6월에 끝난 2차 양적완화 때 6000억 달러를 공급했다. 현재 미국 경제의 최대 고민인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2012년 9월부터 지금까지 시행해온 3차 양적완화는 매달 400억 달러 내외의 모기지 채권(MBS)을 사들이는 정책이다.

막대한 돈을 찍어내며 금융위기의 진화에 나선 버냉키의 선택으로 세계 경제는 일단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다소 무지막지한 방법이긴 해도 많은 돈이 한꺼번에 풀리면 신용도가 낮은 가계와 기업도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고, 이자 부담이 크지 않기에 당장 손에 쥔 돈이 없어도 소비와 투자를 늘릴 여지가 생긴다. 금융위기의 예언자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양적완화는 ‘변칙적이고 미친’ 정책이었지만 금융위기 때 연준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평가했다
출구전략 언급으로 3연임 포기… 세계 경제의 운명은?

미국 대통령선거전이 한창이던 2012년 8월 양적완화에 반대하던 밋 롬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버냉키 의장을 교체하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버냉키의 3연임 포기설이 불거졌다. 그는 연준 의장으로서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잭슨홀 회의 불참을 통보하고 올 6월 2일 자신이 교수로 근무했던 프린스턴대 졸업식 축사자로 나서 “복직을 문의하니 ‘우수한 지원자가 너무 많아 어렵다’고 하더라”는 농담을 던졌다.

6월 19일 버냉키는 양적완화의 중단을 의미하는 출구전략(Exit Strategy) 가능성을 언급하며 세계 금융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발언이 단기 주가 하락을 야기할 것을 알면서도 그가 출구전략을 언급한 이유도 3연임 포기와 관련이 있다. 현재 실업률을 제외한 미국 경제 지표는 금융위기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약(弱)달러로 인한 물가상승 등 부작용을 감안할 때 양적완화를 무한정 고수할 수도 없다. 특히 비전통적 방법인 양적완화는 그 자신처럼 대공황 전문가가 아닌 이상 후임자가 이를 차질 없이 수행하고 적절한 시점에서 거둬들이는 일도 쉽지 않다. 양적완화의 최고수인 ‘헬리콥터 벤’이 “내가 한 일을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의사를 내비친 셈이다.

문제는 그의 퇴임이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 어려운 미국 경제를 더 어렵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유력한 후임인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양적완화 대신 재정정책으로 불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머스는 또 독선적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월가에는 ‘서머스의 등장이 출구전략 집행 시기를 앞당길 수 있으며 그가 연준 내부와 금융시장 곳곳에 포진한 자신의 반대파를 잘 다독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아메리프라이스 파이낸셜의 러셀 프라이스 이코노미스트도 “세계 경제가 아직 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양적완화 자체가 유례없는 비전통적 정책인 만큼 이를 주도했던 버냉키의 부재가 상당한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시장은 헬리콥터 벤이 퇴임한다고 해도 불안이 해소될 때까지 그가 써놓았던 처방전을 다시 읽어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벤 버냉키#연준#대공황#경제#양적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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