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키스트(sunkist).’ 전 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미국의 레몬, 자몽, 오렌지 상표다. 많은 사람이 선키스트를 미국의 농산물 생산업체 이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키스트는 특정 기업의 브랜드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6000여 농가가 농업기업과 도매상들에 맞서 구성한 ‘협동조합’ 이름이 바로 선키스트다.
선키스트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지 오래다. 선키스트 농가들이 엄격한 품질관리를 제1원칙으로 삼고 이를 지켜오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선키스트는 이렇게 잘 관리된 브랜드를 사용해 세계 각국에 과일을 수출하며 판매 수익뿐 아니라 로열티 수익까지 얻는다. 농민과 협동조합이 대기업 못지않은 고급 브랜드를 육성할 수 있다는 점을 선키스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농민의 80%가 조합원인 세계 5위(매출액 기준)의 협동조합, 농협이 자랑할 만한 브랜드로는 무엇이 있을까. 금융 부문에는 ‘농협은행’이란 브랜드가 있지만 농협의 본령인 경제사업 부문에서 선키스트처럼 딱 떠오르는 브랜드는 아직 드물다. 이런 점 때문에 농협은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으로 ‘브랜드 이미지 구축 사업’을 중점 추진하고 있다.
○ 전통과 신뢰의 브랜드 이미지
농협의 가장 큰 브랜드는 역시 ‘농협’이다. 1957년 농업협동조합법의 제정으로 만들어진 농협은 50년 이상 농협이란 명칭을 유치해왔다. 50년의 역사는 농협이란 이름을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만들며 인지도를 높였다. 특히 농협은 정부와 법이 보증하는 협동조합이라는 점에 힘입어 ‘신뢰와 믿음’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농협은 1961년에 이런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로고(사진)를 만들었다. ‘농’의 ‘ㄴ’과 ‘업’의 ‘ㅇ’을 형상화해 만든 이 로고는 지금도 농협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ㄴ’은 싹과 벼를 뜻하며 농업 발전을 상징한다. ‘ㅇ’은 원만(圓滿)함과 돈을 뜻하며 협동단결을 상징한다.
이 두 자음이 합쳐진 농협 로고는 ‘협’의 ‘ㅎ’과 유사한 모양이다. 항아리에 쌀이 가득 담긴 모양과도 비슷하다. 농협 관계자는 “농가 경제의 융성한 발전을 상징하고, 그런 꿈을 농협이 실현하기 위해 이런 심벌마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전통과 미래 사이의 혼선
2007년 농협 브랜드는 영문 브랜드 ‘NH’를 도입하며 다시 한 번 탈바꿈한다. 농협의 영문 표기인 ‘Nong Hyup’의 앞 글자를 따온 이 브랜드는 전통과 신뢰는 물론이고 세련미와 국제적인 이미지까지 함축해 유통그룹, 금융그룹으로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현재 농협은 기존 로고와 영문 브랜드를 함께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 이미지의 혼선이 빚어진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점 때문에 2010년에 브랜드 운용 기준을 마련해 기존 로고와 영문 브랜드를 함께 쓰지 못하도록 정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농협 관계자는 “경제사업 부문 내에 똑같은 사업을 하는 곳에서도 두 개의 브랜드가 함께 쓰여 직원들조차 헛갈릴 정도였다”며 “농협의 이미지를 혼란스러워하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3월 사업구조 개편에 따라 경제사업과 금융사업이 각각 분리되고 금융사업 부문에 은행 및 보험 조직이 신설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로고와 영문 브랜드를 혼용해 쓰던 당시 체제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됐다. 농협의 브랜드 파워와 정체성이 악화될 뿐 아니라 고객과 소비자들도 혼란스러워할 우려가 크다는 주장이었다. 지난해 농협이 브랜드 소비자 인식조사를 한 결과 통일되지 않은 브랜드 사용에 대해 부정적으로 응답한 소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 전통과 미래의 조화
이에 따라 농협은 대대적으로 브랜드 체제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중앙회, 경제지주, 금융지주 등 사업 부문별로 의견을 수렴하고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으며 브랜드 전문기관인 인터브랜드의 컨설팅도 받았다.
설문조사와 컨설팅을 통해 여러 의견이 나왔다. 먼저 기존 로고의 브랜드 자산을 적극 활용해야만 전통과 신뢰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다소 보수적인 이미지이긴 하지만 농협이 농업인과 서민을 위한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수익만을 좇는 다른 대기업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가장 적당한 로고라는 평가도 있었다.
설문조사 결과도 기존 로고에 호의적이었다. 기존 로고에 호감이 있다는 응답이 일반인(61.2%)은 물론이고 농업인(70.1%) 중에서도 절반이 넘었다. 농협중앙회 직원들에게 기존 로고를 형상화한 배지를 착용시켜 농협 임직원 모두가 이런 브랜드 이미지를 일상적으로 홍보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또 중앙회와 지주회사 모두 기존 로고를 버리지 말고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컨설팅을 맡은 브랜드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는 최종 보고서에서 “기존 농협의 전통을 살리는 로고는 중앙회 단일 브랜드로 운용하면서 전문성이 중요한 금융지주만 전문성과 국제성을 살려 영문 브랜드를 병기하는 것이 농협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농협은 설문조사 결과와 컨설팅 내용을 반영해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 구축 전략을 세웠다. 중앙회와 경제지주는 기존 농협 로고를 그대로 사용하고 금융 부문은 기존 로고와 영문을 병기해 전통과 새로움을 동시에 표현하도록 한 것이다. 2007년 영문 브랜드를 새 브랜드로 도입한 상황에서 또다시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고객과 소비자의 혼란이 가중되고 농협의 브랜드 가치도 떨어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다만 중앙회 소속인 상호금융 부문에서 영문 이미지가 필요할 경우에는 별도의 상호금융 브랜드를 개발하거나 영문 브랜드를 병기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경제사업은 농협이 믿을 수 있는 우리 농산물을 공급하는 협동조합이라는 전통과 신뢰의 이미지를 가장 잘 계승해야 하고, 금융부문은 특화된 금융서비스 이미지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농협 관계자는 “앞으로 농협 브랜드를 이용한 캠페인, 광고, 사회공헌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대기업들처럼 브랜드 진단 및 평가지표를 개발하고 점수화해 체계적인 브랜드 구축 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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