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업계가 은행의 불공정 거래 관행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약식 감정자문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부동산 등 담보물 평가업무가 지연돼 은행 대출 연장에 차질이 빚어지는 등 일반 고객의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감정평가협회는 14일 “감정평가업계가 은행에 무료로 제공해온 ‘탁상자문’을 7일부터 전면 중단했다”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선 문서로 제공해온 서비스만 중단하고 구두로 예상 감정가액의 범위만 알려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탁상자문이란 은행이 대출 실행을 목적으로 담보물의 가치에 대해 감정평가업계에 문의하면 서류 검토만으로 가치를 예측해 은행에 제공하는 서비스다. 이를 바탕으로 대출 가능 여부를 판단한 뒤 정식으로 감정 의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은행은 문서탁상감정서를 사실상 정식 감정평가서로 대체하면서 감정평가업체에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고 있다. 또 정식 감정 절차를 밟더라도 여러 곳에 동시 의뢰한 뒤 입맛에 맞는 감정서만 선택해 이용하고, 나머지는 ‘대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수수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협약을 이유로 감정서를 반려하고 있다고 감정평가업계는 주장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약 135만 건의 유·무선 탁상자문서비스를 은행에 무상으로 제공했고 이 중 정식 의뢰로 이어진 경우는 18만3000여 건(13.3%)에 그쳤다. 정식 의뢰를 하더라도 수수료를 지급하지 않은 것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2200억 원에 이른다. 협회 관계자는 “최근 한 은행에서 3개의 감정평가법인에 업무를 주지 않겠다는 협박성 문자메시지까지 보냈다”며 “은행의 우월적 지위에 의한 횡포가 계속될 경우 감정평가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관행은 지난해 법원에서 담보설정비용을 고객이 아닌 은행이 부담하도록 판결하면서 더 심해졌다. 은행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약식 감정자문을 바탕으로 자체 감정을 확대해 왔다.
금융계는 이와 관련해 “땅값이 안정돼 객관적 자료가 있어 은행 자체적으로 전문 인력을 두고 감정 업무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융당국도 최근 ‘은행업 감독규정’ 개정안에 △표준공시지가 등 객관적 자료가 있는 경우 △예상 감정가액이 20억 원 이하인 경우 △대출 신청금액이 예상 감정가액의 100분의 30 이하인 경우에는 은행들이 자체평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감정가액 20억 원 이하가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은행의 자체 감정을 전면 허용한 것이라고 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김태환 한국감정평가협회장은 “자체 감정의 경우 담보를 과다 평가하면 금융부실이 발생하고 과소 평가하면 대출 희망자에게 추가 담보 제공을 요구하는 등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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