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특별수사대 형사 5명이 서울 강동구 길동의 한 지하당구장에 들이닥쳤다. 형사들은 텅 빈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불법 대부업자 김모 씨(43)의 양손에 수갑을 채웠다. 김 씨는 자동차수리업체를 운영하다가 망하자 5년 전부터 사채업을 시작했다. 당구장 한구석에 책상을 차려놓고 수십 명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올렸다. 김 씨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Mr. K 금융’으로 소개했지만 돈을 받아낼 때는 ‘Mr(신사)’가 아닌 ‘악마’였다. 30대 회사원 A 씨는 2009년 12월 급히 목돈이 필요해 김 씨에게 1000만 원을 빌렸다. A 씨는 당구장으로 불려 갈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었다. A 씨는 “그래도 당구장으로 부르는 게 낫다”며 “김 씨가 아버지와 아내를 괴롭힐 때마다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A 씨가 빚진 사실을 A 씨의 가족과 지인에게 알리고 대신 갚을 것을 강요했다. 수백 %의 고리를 매겨 A 씨가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자신에게 돈을 빌리게 하는 일명 ‘꺾기’ 수법을 썼다. A 씨는 “김 씨가 이름 석 자도 겨우 쓰는 80세 아버지를 법원으로 불러내 ‘아들을 살리려면 땅을 넘기라’며 아버지의 땅을 자기 앞으로 가등기해놓았다”고 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A 씨는 2년 남짓 기간에 무려 원금의 두 배가 넘는 돈을 갚았지만 아직 2000만 원의 빚이 남아 있다.
○ 빚보다 빚 독촉에 고통
불법 사금융으로 돈을 빌린 피해자들은 “빚 때문이 아니라 빚 독촉으로 죽겠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대부금융협회가 지난해 5월 3일부터 6월 14일까지 일수 급전 등 사금융으로 돈을 빌린 4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 문항에 응답한 279명 중 120명(43%)에 달했다. 이들은 반복적 전화, 방문 추심행위, 협박성 발언과 폭력, 지인들에 대한 불법 추심 등을 당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추심의 주체는 크게 5단계로 나뉜다. 은행 카드사 등 금융권, 신용정보회사, 등록 대부업체, 미등록 대부업체, 개인업체 순이다. 합법적인 추심은 등록대부업체까지다. 합법적인 추심은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행되지만 신용정보회사나 제2금융권도 압류 운운하며 채무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한국금융연구원 윤창현 원장은 “추심에 관한 법에 빚 독촉 전화나 문자메시지 제한 횟수를 두루뭉술하게 ‘반복적’으로 규정한 것이 문제”라며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줄 경우 불법이라는 것인데 구체적이지 않아 추심업체가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불법 업체들 수단 방법 안 가려
A 씨가 돈을 빌린 불법 개인업체나 미등록 중소 대부업체는 대출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돈을 받아내는 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만난 피해자들은 “폭행은 사라지고 있지만 협박은 더 집요해졌다”고 입을 보았다.
지난해 7월 유흥업소 종업원 윤모 씨(26·여)는 연 209%의 고리대로 2000만 원을 사채업자에게 빌렸다. 사채업자들의 협박을 견디지 못한 윤 씨는 지난달 20일 경기 성남시의 한 오피스텔에서 유서를 쓰고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함께 사는 친구 김모 씨(25·여)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사채업자는 윤 씨가 이자 납부를 자주 미루자 수시로 전화로 연락을 해 ‘돈을 갚지 않으면 유흥업소에 나가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일부 사채업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채무자의 가족이나 지인의 신상까지 털기도 한다.
은행 카드사 등 금융기관의 채권은 신용정보회사 등록대부업체 미등록대부업체 순으로 넘어가거나 반대로 신용정보회사가 자금 사정이 악화된 대부업체의 채권을 받기도 한다. 현행 대부업법은 다른 대부업자 또는 여신 금융기관의 채권을 넘겨받아 추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부실채권은 보통 채권 가격의 10% 미만으로 거래된다”며 “신용정보회사나 대부업체는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구입한 뒤 몇 건만 성사시켜도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100만 원짜리 채권 10건을 100만 원을 주고 구입한 뒤 이 중 2, 3건(200만, 300만 원)만 받아내도 남는 장사란 의미다.
일부 악성업체는 이미 변제된 채권을 다시 받아내기도 한다. 서울에 사는 강모 씨는 2006년 사채업자로부터 400만 원을 빌려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았지만 신용정보회사 추심직원이 집에 나타나 칼을 방바닥에 꽂고 욕을 하며 2006년에 갚지 않은 3000만 원을 갚으라고 했다. 당시 강 씨가 담보로 작성한 약속어음을 이 회사가 넘겨받은 뒤 재차 추심에 나선 것이다. 강 씨는 이 같은 사실을 즉시 경찰에 신고해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민생연대 송태경 사무처장은 “채권추심업은 등록만 하면 할 수 있어 우후죽순 격으로 신규 업체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관리 감독하는 인력은 전무하다”며 “불법 채권추심을 뿌리 뽑기 위해선 상시 감시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