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처럼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조직은 경쟁자를 안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밖(외국 중앙은행)에서 경쟁자를 찾아야 한다.”
김중수 한은 총재(사진)는 16일 인천 서구 심곡동 한국은행 연수원에서 열린 집행간부 워크숍에서 80여 명의 한은 간부를 대상으로 ‘중앙은행의 과제와 비전: 우리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강연의 원고 분량은 A4용지 20쪽에 이른 데다 곳곳에 주석을 달아 학위논문을 연상케 했다.
이 강연문은 김 총재가 거의 매일 두세 시간씩 두 달간 매달려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크숍 직전까지 퇴고를 거듭한 뒤 한은 게시판에 올렸고, 이례적으로 언론에도 배포했다. 강연 내용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과 위상이 크게 변했고, 한은 직원들도 세계 속에서 경쟁하기 위해 정신자세를 재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총재가 간부들에게 따가운 질책과 주문을 하면서 강연 내내 긴장된 분위기였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이날 연설은 2010년 4월 취임해 4년 임기의 절반을 채운 김 총재의 ‘한은 개혁 드라이브’를 요약한 것이다. 외부 출신인 김 총재는 그간 취임사 신년사 등에서 “한은도 ‘철밥통’을 깨야 한다” “직원들이 ‘절간’(한은의 고립·폐쇄성을 빗댄 용어)에서 나와야 한다”며 강한 개혁을 요구해왔다.
그는 한은의 조사연구 역량을 높인다며 수석이코노미스트제도를 도입한 반면 조직 유연화를 위해 ‘직군제’를 없앴다. 특히 올 2월 인사에서 주요 국장직 일부를 1급이 아닌 2급으로 채워 입행 선배가 후배 밑에서 일하게 했다. 또 박사 출신 젊은 직원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조직에 충격을 줬다. 4월이 되면 총재, 부총재, 부총재보 4명, 통화정책·국제·거시건전성분석·조사 등 주요직 국장 4명 등 수뇌부 10명이 박사 7명, 석사 3명으로 구성된다. 한 간부 직원은 “한은도 순혈주의를 깰 때가 됐고 김 총재가 때맞춰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사실”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개혁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한은 직원은 “무리한 충격요법으로 한은의 전통을 흔들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한 간부 직원은 “예전 같으면 앞길이 보장됐던 보직국장들이 줄줄이 연구직으로 물러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밖에서 온 김 총재가 자기가 데리고 온 사람만 기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석사 출신의 한 간부급 직원은 “과거엔 박사를 딴다고 하면 ‘일은 안 하고 자기 경력만 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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