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31일 03시 00분


■ 할부로 본 소비재 교환주기


‘매달 ○○만 원씩 36개월만 내면 신차가 내 품에….’

자동차회사에서 새로운 차를 발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할부 안내 문구다. 모든 자동차회사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12개월도, 24개월도 아닌 36개월을 할부 개월 수로 내건다. 한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요즘 소비자들의 차량 교체 주기는 3, 4년”이라며 “3000만 원 정도 하는 중형차를 36개월 할부로 구입한다고 하면 매달 내야 하는 할부금이 몇십만 원으로 부담이 줄면서 신차 교체 주기와도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채널A 영상] “장롱속 놀고 있는 휴대전화 팔자…”

○ 인스턴트 시대에 사는 대한민국


30일 현대자동차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들의 자동차 교체 주기는 2005년 조사할 때 4.91년에서 2009년 4.71년, 지난해에는 4.52년으로 기간이 줄어들고 있다. 2007년 차를 구입한 소비자는 지난해 새로 나온 차로 바꾼 셈이다. 정작 자동차 기술은 매년 발달하면서 자동차가 수명을 다해 바꿔야 하는 주기는 2000년대 초반 5.6년에서 최근에는 7.4년으로 2년 가까이 늘었다. 자동차 수명은 늘었지만 소비자의 욕구로 교체 주기는 빨라진 것이다.

김용태 한국자동차공업협회 부장은 “라이프스타일과 소득 수준의 변화로 자동차가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면서 출시한 지 3, 4년 지나면 ‘신차’를 몰고 싶어 하는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기술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유행의 전파 속도가 크게 빨라지면서 신제품이 나오는 주기도 빨라졌다. ‘신상(품)’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여는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할부’다. 그런데 이 할부 개월 수에서 빨리 소비되고 빨리 버려지는 ‘인스턴트 시대’ 제품의 수명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휴대전화 시장은 정보통신기기 시장에서도 트렌드 변화가 가장 빠르다. 이 때문에 18개월 정도로 알려진 휴대전화의 교체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동통신사에 가입할 때 소비자가 해당 휴대전화를 쓰겠다고 약속하는 약정 기간도 마찬가지다. SK텔레콤에 따르면 지난해 말 가입자 2680만 명 가운데 24개월 약정을 한 경우가 전체 가입자의 65.8%에 달했다. 30개월 이상 약정을 한 가입자는 25.0%에 그쳤다.

○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인스턴트 소비의 대상에서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가수 윤종신은 2010년부터 매달 신작 앨범을 내는 ‘월간 윤종신’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 달이 지나면 철지난 노래가 되어 버리는 음원 시장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멜론, 벅스뮤직 등 음원 제공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음악듣기 서비스도 대부분 한 달 주기다.

패션업계의 대세가 된 패스트(Fast)패션 영향에 ‘신상’ 옷도 한 철만 지나면 ‘구제’ 옷이 된다. 홈쇼핑회사에서 파는 의류 상품의 경우 70∼80%가 보통 3개월 안팎의 할부 주기가 적용된다. 트렌드컨설팅업체인 트렌드포스트 박은진 수석연구원은 “패스트패션족은 매주 1.5회 쇼핑을 즐길 정도로 쉽게 옷을 사고 유행이 지난 옷은 미련 없이 옷장에서 치워버린다”고 말했다.

할부의 개념을 빌린 렌털 서비스도 제품 교체 주기를 반영했다. 최근 이마트가 냉장고, 김치냉장고 등을 대상으로 시작한 가전 렌털 서비스는 3년이 지나면 구형이 되어버리는 가전시장의 트렌드를 감안한 것이다. 과거에는 결혼할 때 마련한 가전을 10년 넘게 쓰는 것이 ‘절약’의 상징이었으나 요즘 20, 30대들은 최신 기술이 접목된 냉장고와 TV로 갈아타는 ‘쿨(Cool)’한 소비를 한다.

김자혜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총장은 “업체들은 할부를 내세우며 당장 적은 비용으로 오랜 기간 사용하는 가치소비를 할 수 있다고 소비자를 설득한다. 하지만 할부가 끝나면 새로운 제품을 사들이며 또 다른 할부를 시작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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