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사모님들 마트앞 밤샘… 알고보니 마른고추 반값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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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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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산물값 폭등에 주부 비명

25일 오전 9시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나로클럽에서 할인 판매하는 마른고추를 사기 위해 고객들이 매장에 들어서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마른고추 가격이 1년 전보다 2배가량으로 뛰자 할인판매 기간 내내 고추를 사려는 이들의 밤샘 줄서기가 이어졌다. 성남=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25일 오전 9시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하나로클럽에서 할인 판매하는 마른고추를 사기 위해 고객들이 매장에 들어서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마른고추 가격이 1년 전보다 2배가량으로 뛰자 할인판매 기간 내내 고추를 사려는 이들의 밤샘 줄서기가 이어졌다. 성남=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25일 오전 3시경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 인근의 농협 하나로클럽. 주변 술집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모두 꺼진 한밤중에 30여 명의 중년 남녀들이 매장 입구를 서성였다. 이들은 마른고추를 싼값에 사기 위해 문이 닫힌 매장 앞에서 줄을 섰다. 분당 하나로클럽은 18∼28일 시중에서 12만 원이 넘는 마른고추 3kg을 100명 한정으로 5만9800원에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고추 판매는 이날 오전 9시부터 시작하지만 전날 저녁부터 몰려든 사람들이 순서를 표시하려고 매장 입구에 세워둔 쇼핑카트 수는 오전 3시에 이미 100개를 훌쩍 넘어섰다. 몇몇 사람들은 자기 카트를 앞뒤 카트와 노끈으로 묶어 순서가 바뀌지 않도록 한 뒤 주차해둔 자동차나 주차장 구석에서 돗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마른고추를 사려고 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가정주부와 남편이었다. 농협은 식당주인이나 소매업자들의 사재기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마른고추를 1인당 1봉씩만 사도록 제한했다. 고추를 사려고 줄을 선 주민들 중에는 수입차나 대형 세단을 끌고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신문지를 깔고 앉은 주부 최경자 씨(68)는 은퇴한 남편과 분당의 4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23일은 오전 6시, 어제는 오전 4시에 왔는데도 허탕을 쳐 아예 전날 밤 10시에 왔는데도 앞에 63명이나 있었다”며 “가장 빨리 온 사람은 오후 8시부터 기다렸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분당의 가정주부들이 마른고추를 사려고 노숙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은 치솟는 물가 때문이다. 여름 내내 이어진 긴 장마로 추석을 앞두고 농산물값이 급등하자 중산층 ‘사모님’들마저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며 밤샘을 자청했다. 하지만 물가상승세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조차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 최고치에 이를 것으로 보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 5% 선 돌파가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다.

○ 마른고추가 부른 밤샘 줄서기

개장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기저기 흩어져 잠을 청했던 사람들이 자기 카트를 챙겨 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매장 입구부터 늘어선 줄은 금세 200m를 넘어섰다. 카트로 순서를 표시해 뒀지만 곳곳에서 새치기냐 아니냐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뒤늦게 나타난 한 60대 주부는 슬그머니 자기 카트를 밀어 넣으려다 순서가 밀린 주부들과 욕설과 함께 몸싸움까지 벌이다가 직원들의 제지로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개장시간인 오전 9시. 농협 직원이 마른고추를 사려고 기다린 고객들만을 위한 전용 입구를 열어 한 사람씩 매장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마른고추 구입전쟁은 5분 만에 끝나버렸다. 고추를 보지도 못한 80여 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부인과 함께 왔다가 고추를 사지 못한 오모 씨(64)는 상기된 얼굴로 “정부가 물가를 못 잡으니까 살기 힘들어 이러는 것 아니냐”며 “물자가 부족한 북한도 아니고 마른고추 사려고 밤새워 기다리는 게 말이 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분당 하나로클럽이 마른고추 할인 판매를 진행한 28일까지 밤샘 줄서기는 반복됐다. 하나로클럽 관계자는 “지난해 배추파동과 올해 구제역 때도 배추와 한우 반값 할인행사를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마른고추 값이 계속 올라 다소 과열된 것 같다”고 말했다.

○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 5% 선 위협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마른고추(양건상품 기준)의 전국 평균소매가격은 600g당 1만9733원으로 1년 전 1만224원보다 2배가량으로 뛰었다. 올봄까지 이어진 이상한파에 오랜 장마로 탄저병이 돌면서 고추 생산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평년 생산량의 80% 수준이었던 지난해와 비교해도 올해 고추 생산량은 10% 넘게 줄었다”며 “일부에서는 수십 년 만의 최악의 고추 흉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고추만 가격이 오르는 게 아니다. 무는 지난해보다 44.3%, 당근은 41.5% 올랐다. 지난해 물가대란을 불러왔던 배추 역시 최근 한 달 새 33.0% 뛰었다.

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7월의 4.7%를 넘어 올해 최고치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008년 9월 5.1% 이후 2년 11개월 만에 5%를 넘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최근 기상 여건이 좋아지면서 농산물 작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도 “농산물 가격이 많이 올라 8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7월의 4.7%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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