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는 ‘세계 1등’ ‘독주’ ‘경쟁’처럼 치열함을 느끼게 하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삼성그룹도 ‘업계 최고 수익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최근 이 회장과 삼성의 기존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재계에서 나오고 있다. 삼성은 8월 1일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계열사인 아이마켓코리아(IMK)의 지분 전량을 매각하기로 하고, 7월 30일 천안·아산 건강검진센터 설립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삼성 안팎에서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바뀌는 신호탄”이란 말이 나온다. 이 회장이 ‘포기 경영’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통해 사소취대(捨小取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음)의 ‘그랜드 디자인’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에 대한 압박이 강해지고 대기업의 MRO 사업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5월 해당 계열사인 IMK의 사업을 내부 거래로만 한정하고 신규 거래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삼성은 이 조치만으로도 SK LG 포스코 등 MRO 계열사를 보유한 다른 대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반성장에 대한 성의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1일 아예 IMK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7월 30일 강북삼성병원이 충남 천안 아산 지역에 지으려던 건강검진센터의 설립을 백지화했다. 충남 각지에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코닝 삼성정밀 등 주력 계열사의 공장을 대거 보유한 삼성은 당초 임직원의 요구에 따라 KTX 천안아산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아산배방택지개발사업지구에 1800m²가 넘는 첨단 건강검진센터를 지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역 의료계가 “대기업이 대형병원을 앞세워 지역 의료계를 망하게 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입주할 건물까지 확정해 놓은 상태에서 사업을 포기했다. 그 대신 임직원의 편의를 위해 삼성 공장 내부에 간단한 건강검진을 해주는 소규모 사내병원을 만들 예정이다. 삼성이 잇달아 두 사업을 포기한 것을 보면 비핵심 계열사와 소규모 사업의 철회 정도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삼성은 적자가 나거나 법이나 규제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를 제외하곤 우량 사업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게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 관계자는 “10년 넘게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갖췄고 별다른 문제도 없는 사업을 삼성이 스스로 접은 것에 대해 삼성맨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이 회장의 비즈니스 마인드라면 절대 물러서지 않았을 사안들”이라고 말했다.
IMK는 삼성 계열사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연간 1조500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려왔다.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에 자리 잡은 강북삼성병원 건강검진센터는 건강검진 고급화 바람을 주도해 삼성 의료서비스의 이미지를 높이면서 상당한 수익을 올려왔다.
삼성이 두 사업을 포기한 이면의 공통분모는 ‘승자 독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다. MRO가 대기업의 과실 독식을 부추기고 대기업 병원이 지역 의료 환경을 힘들게 한다는 비난 때문에 사업을 접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삼성 안팎에서는 이 회장이 사회적 비판 여론을 의식해 ‘소통을 위한 포기’를 감수하는 방식으로 경영 철학을 바꾸는 신호탄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지난해 이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그룹 내부적으로는 올해 초부터 소통과 사회적인 정서를 큰 틀에서 보는 방식에 대한 고민과 작업을 많이 해왔다. MRO 포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올해 신년하례식에서 “많은 사람이 상생을 중소기업을 돕는 것으로 거꾸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건 대기업을 돕는 거다”라며 특유의 반어법을 구사한 바 있다.
또 다른 삼성 고위 임원은 “사회적으로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업이 몇백억 원, 몇천억 원을 벌어들인다 해도 그로 인한 사회적 부담이 너무 커지면 결과적으로 삼성그룹 전체에 해가 된다는 확신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는 ‘유능한 기업’을 넘어서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삼성그룹의 비즈니스 전반에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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