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말줄임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인터넷 신조어는 물론이고 TV 프로그램 제목도 조금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이내 두세 글자로 줄인 제목이 원제목보다 더 많이 쓰이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보다 이름이 짧아서 그런지 사람이든 사물이든 긴 이름을 유난히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와인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외국에서도 이름이 긴 와인이나 자주 사용하는 와인 용어는 약어로 쓴다.
와인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약어를 쓰는 게 더없이 편리하겠지만, 초보자 입장에서 보자면 와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데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원활한 비즈니스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속성으로 와인에 대해 배우는 비즈니스맨들의 와인 수준이 들통 나는 것도 약어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로라하는 국내 식당이나 와인바의 리스트를 봐도 늘어나는 와인 목록을 기록해 놓기 바빠선지 구체적인 와인 설명은 갈수록 사라지고, 웬만한 용어는 아예 약어로 기입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의 긴 이름을 전부 외우지 않아도 되는 약어도 있다. 나라를 막론하고 와인 등급을 나타내는 용어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무리 열렬한 와인애호가라도 독일 와인 등급 용어인 ‘쿠알리테스바인 미트 프레디카트’를 온전히 다 발음하지는 않는다(다 발음하는 편이 더 이상하다). QmP로 적고 ‘쿠엠페’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와인 종류를 나타내는 ‘트로켄베렌아우슬레제(TBA·독일산 스위트 와인), 셀렉시옹 드 그랭 노블(SGN·프랑스 알자스산 스위트 와인), 뱅 두 나튀렐(VDN·프랑스 랑그도크루시용산 스위트 와인) 등은 상황이 다르다. 쓸 때는 약어로 기록해도 말할 때는 정식 용어를 끝까지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래의 긴 이름을 끝까지 발음하든 안 하든, 이들 약어의 공통점은 세계적으로 통용된다는 점이다. 즉 어느 나라 말로 된 와인 용어자료에서든 이들 용어를 찾을 수 있다.
반면 공공연히 국내에서만 사용되는 약어도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유명 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의 경우 몇몇 업장의 와인 리스트에는 버젓이 BDM이라고 적혀 있고, 아예 소믈리에가 ‘비디엠’이라고 소개하는 곳도 있다. ‘브루넬로’라는 줄여 부르는 말이 있지만 국내 상황은 조금 예외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론의 샤토뇌프뒤파프 와인을 지칭한다는 CDP 역시 마찬가지다.
식품첨가물 MSG 때문에 매번 혼동되면서도 또 그 덕분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약어로는 GSM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 남부와 호주 레드 와인 중 그르나슈(Grenache), 시라(Syrah), 무르베드르(Mourv`edre)를 블렌딩한 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 지역 와인을 언급할 때 많이 쓴다.
김혜주 와인칼럼니스트
● 이번주의 와인 에스쿠도 로호
프랑스의 바롱 필리프 드 로칠드사가 칠레에서 생산하는 이 와인은 고유의 빨간 라벨 덕분에 단번에 소비자들의 눈을 사로잡지만 여섯 음절이나 되는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저 ‘빨간 라벨 와인’으로만 불리던 것이 최근 말줄임 유행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앞글자만 따서 부르다 보니 조금은 민망하지만 결코 잊지 못하는 이름(에로)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붉은 방패’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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