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상담의 시니어 파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27일 23시 34분


"지은 지 50년 된 아파트라는데 가보니 주위엔 남은 집이 거의 없더군요. 그때가 12월 중순이었는데 재개발한다고 1월 말까지 집을 비워달라고 했답니다."

의뢰인인 서모 씨 사례를 얘기하던 부채상담사 이동기 씨(60)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서 씨의 가정은 불우했어요. 큰 아이는 난청, 둘째는 희귀병. 그래도 가족애가 있었어요. 서 씨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속내를 털어 놓는데 나도 눈물이 나고 말았어요."

이 씨는 "대출도 대출이지만 위로와 격려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며 "'마음 단단히 먹고 이사비용 저축하라, 날이 따듯해질 때까지만 버텨보라'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저소득층이 이용할 수 있는 대출 정보와 이사할 때의 유의점을 설명했다고 한다.

● "시니어 파워 보여줍니다"

이 씨는 은행지점장 출신이다. 2002년 서울은행에서 명예퇴직했다.

이 씨는 지난해부터 부채전문상담회사인 포도재무설계(대표 라의형)에서 저소득층에 대한 부채상담을 시작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 재무적 해법보다 더 중요한 건 의뢰인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하느냐는 것, 즉 동기부여를 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점이다.

포도재무설계엔 이 씨를 포함해 34명의 시니어 부채상담사가 일한다. 평균 연령은 62세로 모두 전직 은행지점장 출신이다. 주요 수입원은 상담료이고, 보수는 상담 건수에 따라 나가는 성과급제다.

라의형 대표(46)는 퇴직자 출신이 아니지만 부채상담 전문가로 시니어들을 초빙해 일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니어 인력 고용을 크게 늘였다.

라 대표는 동아일보와 부채클리닉 캠페인을 할 때 상담 요청이 예상했던 것의 10배가 넘어 상담사 인력을 구하느라 고민하던 중 "은행지점장 퇴직자가 상담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들었다. 그는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막상 시켜본 후 그들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시니어들은 금융 전문가인데다 인생 경험이 풍부해 금융 솔루션 외에도 젊은 사람이 제시할 수 없는 인생 설계상담도 할 수 있었다. 라 대표는 "그것이 시니어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 한 사람 당 20시간 상담, 은행 시절의 20배 이상

이곳에서 하는 부채상담이 은행권 대출상담과 다른 것은 의뢰인 한 사람에 대해 걸리는 시간만 봐도 알 수 있다. 은행권에선 대출 기준이 명확해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에겐 대출하지 않는다. 상담 시간은 평균 10여 분이고 상환계획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부채상담은 다르다. 정성조 상담실장(62)은 "부채의 원인은 사는 이야기를 들어야 정확히 파악된다"고 말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채가 생긴 직접적 원인을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말 못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정적 원인은 그곳에 숨어있다.

정 실장은 "숨겨진 이야기까지 다 들으려면 평균 상담 시간이 2시간은 족히 된다"고 말했다. 의뢰자들이 생업으로 바쁠 땐 집까지 찾아간다. 보통 상담은 4차례 이루어지는데 이동시간까지 합치면 의뢰인 한 사람 당 족히 20시간을 투자한다.

근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주 3일 근무가 원칙이다. 보수는 은행권 재직시절의 10분의 1 수준. 노동량이 많은 편은 아니나 보수가 적어 자원봉사에 가깝다.

그래도 시니어들은 일을 하니 더 건강해졌다고 말한다. 이 씨는 "해마다 맞던 독감 주사를 안 맞아도 감기에 안 걸리는 게 일을 하고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크지 않은 돈 때문에 골머리 앓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보람도 크다. "막힌 곳을 뚫어주고 마중물을 부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정 실장의 얼굴에선 미소가 살짝 엿보였다.

● 저소득층 정책 자금지원사업과도 시너지 낼 것

라 대표와 시니어 부채상담사들은 요새 또 하나의 실험을 하고 있다. 대부업체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들어 일반 대부업체의 절반 정도 금리로 저소득층에 대출해 주는 일이다.

라 대표는 "다른 대부업체는 돈만 빌려주고 끝이지만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은 재무설계를 하면서 원리금 상환표를 만들어주는 등 2, 3년 내 갚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고 말했다. 현재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라 대표는 은행 출신 시니어 부채상담사를 활용하는 일자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에 대한 정책 자금을 집행할 때 한 가정 당 시니어 부채상담사를 한 명 씩 붙여서 계획대로 착실히 생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기자는 것이다.

라 대표는 "아무리 많은 돈을 퍼주더라도 사후 관리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며 "어려운 사람들은 비슷한 일들을 반복해서 겪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리와 유대관계가 필요한데 이런 역할을 시니어들에게 맡기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지기자 n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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