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기술 전해준 美-佛 제쳐… 요르단 등 ‘제2 판로’ 교두보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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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원전 수출국 등극
중동 ‘원자력붐’에 전망 밝아
건설→운영 토털 서비스
부가가치 지속적으로 창출


“우라늄 1g이면 석탄 3t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한국은 자원빈국이 아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전력 복구를 주도했던 미국의 전기기술 대가 워커 시슬러 박사는 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나 원자력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역설했다.

그로부터 53년 후 한국은 원자력발전소를 아랍에미리트(UAE)에 직접 지어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한국에 원자력발전 기술을 전수한 미국 및 프랑스 회사들과 당당히 겨뤄서 따낸 쾌거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인 셈이다.

○ 한국형 원전의 경쟁력 인정

이번 원전 계약 규모는 직접 건설비용 200억 달러에다 완공 뒤 운영, 연료봉 공급, 폐기물 시설 등 후속 부문 200억 달러 등 모두 4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번 수출은 원전을 지어주고 키를 넘겨주는 턴키방식이 아니라 건설에서 운영까지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부가가치가 지속적으로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제 외적인 효과도 상당하다. 한국형 원전의 경쟁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이 미국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일본에 이어 세계 6번째 원전 수출국이 된 것은 선진 기술력을 가진 원전산업 강국으로서의 국가 이미지를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격(國格)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UAE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한국이 원유를 두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중동 국가다. 중동지역 최대의 수출시장이기도 하다. 이번 원전 수출로 양국 간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큰 소득으로 볼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건설될 원전 조감도. 사진 제공 한국전력공사
아랍에미리트(UAE)에 건설될 원전 조감도. 사진 제공 한국전력공사

○ ‘포스트 UAE’ 전략도 마련

우리나라가 이제 원전 수출국 반열에 올라선 만큼 다음부터는 더욱 좋은 조건으로 원전을 수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캐나다는 현재 원전 수출에 참여하지 않고 있어서 실제로 원전 수출이 가능한 국가는 우리나라 외에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밖에 없다.

김영학 지식경제부 제2차관은 27일 브리핑에서 “원자력발전은 향후 세계시장이 더 커질 분야이기 때문에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본격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포스트 UAE’에 대비해 터키와 요르단 등 원전 도입 계획이 가시화된 신규 원전시장을 대상으로 민관의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원전 도입을 계획 중이지만 도입 기반이 취약한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원자력 인력 양성과 인프라 구축을 지원해 중장기적인 고객으로 삼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제2의 중동 붐’도 기대

이번 UAE 원전사업은 최근의 원자력 붐을 타고 중동지역에서 추진되는 첫 원전이다. 앞으로 오일달러가 풍부한 아랍권 다른 국가들의 원전 건설 경쟁이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지역 국가들은 지금까지 석유자원이 풍부해 원전 개발에 관심이 없었지만 치솟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고 석유 고갈 이후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원전 건립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분위기다.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날 “이번 원전 수주가 단순히 국제 원전 수출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것을 넘어서 ‘제2의 중동 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UAE 계약 물량인 4기 외에 추가 원전 수주도 기대되고 있다. 세계원자력협회에 따르면 UAE는 7기 내외의 원전을 더 지을 것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요르단은 4일 원자로 건설 국제경쟁 입찰에서 한국원자력연구원-대우건설 컨소시엄을 최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 계약을 위한 협상 절차에 착수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현재 20∼30MW 수준의 태양광발전소 건설을 검토 중이며 원전 건설을 위해 용지 선정 프로젝트를 발주한 상태다. 이집트 역시 원전 건립 의사를 밝히고 적정 용지를 물색하고 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이달초까지 현지선 “우방국 佛 낙점될 것”
靑-지경-교과부 채널 총동원 ‘막판 뒤집기’▼
■ 피말린 ‘수주 전쟁’ 1년



2004년 중국, 200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2008년 캐나다….

한국이 원자력발전소 수주를 위해 뛰어들었지만 고배를 들었던 나라들이다. 하지만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는 달랐다.

1년여에 걸친 ‘총성 없는 전쟁’의 승리는 전략의 승리였다. 한전은 지난해 12월부터 수주 준비팀을 가동했다. 2월 아부다비에서 열린 입찰설명회가 끝난 뒤 한전은 ‘글로벌’과 ‘시스템’이라는 카드로 승부를 보겠다는 방침을 굳혔다.

우선 기술력을 갖춘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영국의 AMEC사를 끌어들였다. 한전 측은 “외국 기업의 참여를 통해 ‘한국이 주축이 된 글로벌 팀’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며 “우리 컨소시엄에 참여한 외국 업체들은 다른 두 곳으로부터도 참여 제의를 받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정된 운영능력과 가격경쟁력을 보고 우리 쪽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시공업체 선정에도 공을 들였다. 심사를 통해 시공능력이 우수하면서도 UAE에서 인지도가 높은 현대건설과 삼성물산이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이에 따라 한전 컨소시엄은 원전 건설부터 운영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적극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종 선정까지는 쉽지 않았다. UAE와 프랑스가 정치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탓에 12월 초까지만 해도 아부다비 현지에서는 “아레바의 선정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5월 직접 UAE를 방문해 국영기업인 아레바를 지원 사격했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는 ‘밀착 스킨십’으로 막판 뒤집기에 나섰다. 지경부는 물론이고 청와대, 교육과학기술부, 국방부 등의 외교 채널이 총동원됐다. 한전 관계자는 “정부에 지원을 요청할 때만 해도 이렇게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총리실, 청와대가 직접 앞장서 수주 준비팀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줬다”고 말했다.

50년 만에 원전 수입국에서 원전 수출국으로 변신한 한국의 모습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경부 관계자는 “기술력이 전무한 UAE는 자체 기술을 보유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며 “UAE는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된 한국처럼 되기를 희망했고 이 점이 경쟁 막바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 함께 체결된 한-UAE 경제협정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노하우를 전수해주겠다”고 제시한 것도 UAE 최고위층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아레바가 현재 건설 중인 핀란드 원전사업의 공기가 2년 이상 지연되고 공사비가 당초 예정보다 2배로 늘어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국 한전 컨소시엄은 ‘400억 달러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원전뿐 아니라 다방면 협력 가능” 결정권 쥔 왕세자 6차례 전화설득▼
■ 李대통령 ‘스킨십 결정타’


이명박 대통령은 27일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건설공사 수주 결정 후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뒤 김쌍수 한국전력공사 사장 등 입찰 관계자들을 격려하며 “내 입술 터진 보람이 있다. (당신들도)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 어떠냐”며 활짝 웃었다. 국가대항전으로 진행된 UAE 원전 수주 경쟁에선 이 대통령의 막후 비즈니스 외교가 빛을 발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소매를 걷어붙인 것은 11월 초였다. 이 대통령은 이번 입찰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는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부다비 왕세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좀 더 시간을 달라. 한국은 원전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협력할 수 있다. 원전 기술력도 (프랑스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UAE의 국부로 추앙받는 고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나하얀 대통령의 셋째 부인이 낳은 장남으로 현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 대통령의 이복동생이다.

이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와 모두 6차례 통화를 했다. 이 대통령은 통화에서 UAE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大)산유국이지만 수십 년 뒤의 ‘포스트 오일시대’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 인프라인 원자력과 첨단 정보통신, 인력 양성의 상생협력을 한국이 제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UAE가 한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낭보가 전해진 것은 이 대통령이 유엔 기후변화협약 정상회의 참석차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17∼19일)한 뒤 귀국길에 올랐을 때였다. 이 대통령의 아부다비 방문을 요청하는 연락이 UAE 측에서 왔다. 정부는 이후 프랑스 측의 뒤집기를 막기 위해 막판까지 보안을 유지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이 대통령이 26일 수도 아부다비에 도착했을 때 무함마드 왕세자는 예고 없이 영접을 나왔다. 이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와 35분간 환담하며 “양국이 원전 건설 프로젝트 건으로 만남을 시작했으나 여러 면에서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도 “오늘은 양국이 과거와 다른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날이다”며 ‘형제국’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이 대통령에게 걸프협력회의(GCC) 형제국에만 제공하는 에미리트팰리스호텔 8층의 로열스위트룸을 숙소로 제공하는 등 친근감을 나타냈다.
아부다비=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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