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카페]명퇴시킨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들

  • Array
  • 입력 2009년 11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KT퇴직자 50여명 ‘프로KT’
회사사랑 생활지침 나누기로
“내삶 바친 회사 무조건 좋아”


우리에게 직장이란 삶의 다른 이름입니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료들이 있고, 내가 이뤄야 할 꿈이 거기에 있죠. 그래서 직장이 우리를 배신할 때, 우리는 삶에 배신당한 느낌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들도 그랬다고 합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KT가 명예퇴직제도를 마련해 구조조정을 시작하자 회사를 떠나야 했던 퇴직자들 얘기입니다. 청춘을 고스란히 바쳤던 직장이 등을 떠밀자 손발이 떨리고 분노가 치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이들은 올해 초 ‘프로(pro) KT’라는 모임을 인터넷에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인 퇴직자들이 회사를 욕하는 ‘안티(anti)’가 되는 것과 달리 자신들은 회사를 편들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묻자 KT와 KTF의 합병, 통신시장의 경쟁 심화를 지켜보며 ‘이러다 KT가 흔들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는군요.

이들은 지난달 중순 서울 광화문 근처의 한 식당에서 첫 오프라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올해 말까지 100명 이상의 회원을 모으겠다며 ‘프로 KT맨 생활지침 10가지’를 인쇄해 서로 나누더군요. 지금 이 모임의 회원은 50여 명입니다. 생활지침이래야 KT 제품을 애용하자는 게 전부입니다. 심지어 휴대전화기를 자주 바꾸면 KT가 제조업체에 보조금을 많이 지급하게 되니 휴대전화를 배터리만 바꿔가며 오래 쓰자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런다고 KT가 큰 덕을 볼 리는 없겠지만 그 마음이 참 신선했습니다. 이 모임의 임홍순 대표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날 땐 원망도 했지만 회사를 원망해봐야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이 되겠더라”고 하더군요.

그들에게 회사는 삶이었습니다. 비록 삶은 그들을 속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힘든 시기입니다. 삭막한 빌딩숲 구석구석에서 삶과 씨름하는 모든 직장인에게 이들의 조금 다른 생각이 가을바람을 타고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상훈 산업부 기자 sanh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