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리포트]긁게하라, 카드마케팅은 과학이다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현대카드, 미운오리서 백조되기까지
750만 회원 소비패턴 수백가지 데이터 분석
업계 혁신 주역으로

2003년은 잔인한 해였다. 그해 터진 한국의 신용카드 부실사태는 지난해 세계 경제를 패닉(심리적 공황)에 빠뜨린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축소판이었다.

2003, 2004년 2년간 한국 카드업체들의 적자 규모는 10조 원을 넘었다. 2001년 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하며 카드사업에 뛰어든 현대카드도 이 풍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시장 점유율이 2%도 안 됐지만 2003년 6300억 원, 2004년 2300억 원의 적자를 내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카드업계는 2003년부터 모두 긴축경영으로 돌아섰다.

현대카드는 이때 ‘현대카드M’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과감히 꺼내들었다. 수백억 원을 광고비로 투자하며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였고 다른 업체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카드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해 말부터 15개월간 준비한 끝에 최상위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연회비 100만 원의 슈퍼 프리미엄 카드 ‘더 블랙’을 내놓았다. 현대카드M은 단일카드로는 처음으로 600만 회원을 돌파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더 블랙은 VVIP 카드 시장을 개척한 효자상품이 됐다.

이런 노력으로 2005년의 당기순이익은 638억 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꾸준히 이익을 늘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지난해에 최대 영업이익(2578억 원)을 냈고 시장점유율도 14.6%(신용판매액 기준)로 업계 2위 자리를 굳혔다. 후발주자인 현대카드가 카드시장의 혁신을 선도하며 이처럼 도약한 비결은 무엇일까.

○ 알파벳 카드이름… 감성으로 고객에게 접근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자사의 성공전략을 ‘티파니 보석상자에 싸인 과학(Science in Tiffany Box)’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티파니 보석상자란 현대카드의 기발한 광고, 파격적 디자인, 스포츠·문화 마케팅으로 대표되는 감성적 접근방식을 뜻한다.

현대카드는 톡톡 튀는 광고로 유명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현대카드M),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현대카드W) 등 광고 카피와 CM송은 크게 유행했다.

국내 최초로 투명카드, 미니카드, 명화가 그려진 갤러리카드, 자동차 모양의 프리폼카드 등을 선보이며 다른 카드와 디자인을 차별화했다. 현대카드가 세계적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와 레옹 스탁의 디자인을 도입한 뒤 유명 디자이너 작품을 카드에 접목하는 게 한국 카드업계에서 일반화됐다.

이름에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붙이는 알파벳 마케팅, 블랙·퍼플·레드 등 색깔을 붙인 컬러 마케팅도 차별화 요소로 작용했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스포츠, 문화 마케팅으로 현대카드 고객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했다. 마리야 샤라포바, 로저 페더러, 김연아 등 스포츠 분야의 세계 최정상급 선수를 초청해 펼친 ‘슈퍼매치’와 빌리 조엘, 플라시도 도밍고 등을 초청한 ‘슈퍼 콘서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루이비통, 할리데이비슨,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과 손잡고 VVIP 고객을 대상으로 펼친 각종 행사는 국내 금융계에서 이전에 없던 마케팅 방식이었다.

○소비패턴 분석… 과학으로 실적 높여

지난해 말 현재 국내에서 발급된 신용카드는 1억여 장. 경제활동 인구 1인당 약 4장의 카드를 갖고 있다. 현대카드의 고객 1인당 월평균 신용판매 사용액은 80만∼90만 원대로 다른 카드사의 2배 수준이다. 감성적 접근 방식으로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고객을 끌어들일 수는 있어도 실적에서 이런 결과를 내긴 어렵다.

이와 관련해 현대카드의 박세훈 마케팅본부장은 “티파니 상자 안에 담긴 과학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카드의 화려한 이면(裏面)에 정교하고 과학적인 고객분석 기법이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본부장은 “단순히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현대카드를 ‘메인카드’로 쓰도록 하는 게 우리의 최종 전략”이라며 “이를 위해 고객 데이터를 끊임없이 분석해 고객에게 적합한 상품을 제공하고, 상품에 맞는 고객을 찾는다”고 소개했다.

현대카드 마케팅본부에는 ‘CLM(Customer Lifecycle Management) 사업실’이 있다. 다른 카드사의 고객관계관리(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사업실의 직원 60명이 회원 700만 명의 소비패턴과 카드사용 행동, 실적, 라이프스타일 등 수백 가지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을 관리한다.

지난해 말엔 이렇게 분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 관리전략을 짜고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까지 담당하는 P&C(Program&Communication)팀도 만들었다. 김지훈 P&C팀장은 “우리 팀의 역할은 과학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고객과 감성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찾아내는 것”이라며 “상품별로 공략할 고객을 찾아내고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결정하며 최종적으로 고객의 반응까지 살핀다”고 말했다.

○ 고객의 짜증까지 분석한다

현대카드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고객 데이터 분석을 통해 고객이 카드를 새로 발급받은 뒤 6개월 안에 사용하는지 여부가 향후 카드사용 실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따라 카드 발급 후 6개월간 집중적인 유인 마케팅을 펼치는 ‘EEP(Early Engagement Program)’를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예를 들어 새로 발급받은 현대카드로 고객이 항공권을 샀다면 면세점 할인 쿠폰을 보내주는 식이다. 여행에 특화된 현대카드W를 발급받은 고객이 병원, 약국을 많이 이용한다면 의료 분야의 혜택이 많은 현대카드H를 새로 제안한다.

이처럼 각 고객에 특화된 마케팅 정보는 청구서나 e메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로 전달된다. 현대카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에게 거는 전화나 SMS가 고객의 짜증을 유발하지 않도록 ‘고객 피로도’까지 수치화해 관리한다.

상류층 라이프스타일 분석… VVIP시장 개척

이런 자료를 토대로 최근에는 특정 고객에게 회사가 거는 전화의 횟수를 3개월에 한 번으로 제한했다. 박 본부장은 “현대카드의 텔레마케팅 성공률은 20%로 카드업계 평균의 2배 수준”이라며 “고객의 행동패턴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카드 이용을 활성화하는 게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은 신용카드 업체의 실적을 좌우하는 연체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올해 들어 다른 카드업체의 연체율이 3∼5%대로 치솟을 때 현대카드의 연체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3월 말 현재 0.6%로 업계 최저 수준이다.

○데이터 분석으로 새 고객 찾아내

현대카드가 선도하고 있는 최상위층 대상의 VVIP 마케팅도 객관적 데이터를 분석해 나온 결과물이다. 월 1000만 원 이상 카드를 이용하는 고객의 소비성향, 한국의 자산가와 특정지역 부유층의 통계, 은행 프라이빗뱅킹(PB) 이용자 수, 해외 프리미엄 카드시장 추이 등 데이터를 분석한 끝에 한국에도 파격적으로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원하는 VVIP계층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어 관련 마케팅을 강화한 것이다.

핵심 고객인 VIP 고객을 다시 세분해 서비스를 차별화한 것도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철저히 분석한 결과다. 현대카드는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대기업 부장급 이상 등 상위 5%에 드는 고객을 타깃으로 ‘더 퍼플’ 카드, 컨설턴트 예술가 등 젊은층 전문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더 레드’ 카드 등으로 VIP 카드를 세분했다.

또 올해 1월 선보인 뒤 3개월 만에 1만6000장이 발급되는 등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자영업자 전용 ‘마이비즈니스카드’는 현대카드 가맹점주들의 정보를 분석한 끝에 기획한 상품이다. 자영업자는 리스크가 높은 고객으로 분류돼 카드 이용 및 현금서비스 한도 등에서 제약을 많이 받았지만 카드 가맹점주의 카드 사용 패턴, 업태 등을 분석한 결과 의외로 신용도 높은 우량고객이 많아 이들에게 특화된 상품을 만든 것이다.

박 본부장은 “기존의 데이터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고객과 고객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며 “현대카드의 창의적 아이디어의 원천은 바로 객관적 데이터”라고 강조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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