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 사정은 달라도 ‘채무탈출’ 소망은 하나

  • 입력 2009년 4월 14일 22시 59분


"신청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선생님, 정말 변제 잘 할게요. 꼭 연체이자 감면 받게 해주세요." 근심스런 표정의 40대 부부는 정종식 신용회복위원회 선임심사역에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서울 강동구에서 PC방을 운영 중인 이 부부는 사업 준비자금과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은행과 카드사에 2300만 원의 빚을 졌다. 그동안은 PC방을 운영하며 그럭저럭 이자를 갚아왔지만 올해 들어 수입이 절반가량 줄어들면서 이자를 갚지 못해 단기연체자가 됐다. 13일 기준 연체일수 67일째다.

서류를 살펴보던 정 심사역이 "강원도 횡성에 땅이 있는데 부동산이 있으면 금융회사들이 프리워크아웃 동의를 안해줄 수도 있어요. 처분하시는 게 어떤가요"라고 말하자 부부는 한숨부터 쉬었다. "안 그래도 그 땅 처분하려고 여러 군데 알아봤어요. 1금융권은 물론 2금융권에서도 가치가 없다고 담보대출을 안해주네요. 한 지역농협에서는 길을 내주면 대출을 해주겠다는데 길 낼 돈이 어디 있나요."

신용회복위원회가 개인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재조정) 상담을 시작한 13일 서울 중구 명동 센트럴빌딩 6층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실은 하루 종일 신청자들로 붐볐다. 기자는 정 선임심사역의 보조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단기연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어 보았다.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최대 피해계층이 자영업자나 중소업체 근로자들이라는 점이다.

●외환위기 때와는 확연히 다른 피해계층

한때 법인체 대표였다가 보증을 잘못 서서 단기연체자로 추락한 50대 남성,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빚더미에 앉은 30대 주부, PC방 매출 부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40대 부부, 토스트가게를 하며 부모를 봉양하는 20대 남성, 불행하게 찾아온 교통사고로 병원비 부담에 시달리는 30대 남성…. 연체자가 된 이유는 다양했지만 지금 이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 금융회사로부터 동의를 받아 프리워크아웃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다.

프리워크아웃 제도는 여러 금융기관에 빚을 진 다중채무자 중에서 1개월 초과 3개월 미만 연체자들이 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에 채무재조정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2년 전만해도 번듯한 법인체 대표였던 박모 씨(56)는 이날 정 심사역의 첫 번째 상담자였다. 그는 "신문에서 프리워크아웃 시행 기사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연체이자를 감면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증을 선 지인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박 씨의 평온한 일상이 깨졌다. 그는 사업장을 모두 정리해 빚을 갚았지만 그래도 남은 빚이 있었다. 친척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출 이자는 꼬박꼬박 갚아왔지만 얼마 전부터는 이자도 벅찼다. "한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한번의 실수로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회한이 스쳤다.

다음 신청자는 20대 청년.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학을 중퇴하고 아버지,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생업 현장에 뛰어든 청년 가장이다.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한 커피와 토스트 가게 매출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생활비 등으로 쓴 카드대금 1500만 원 때문에 단기연체자가 됐다.

"가게 근처에 은행이 있었는데 이사를 가서 매출에 타격을 입었어요. 채권 추심회사에서 그나마 유일한 재산인 가게 보증금(700만 원)을 소송해서라도 받겠다고 하네요. 프리워크아웃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채권추심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첫날 전국에서 583명 신청

경기 일산에서 온 주부 김모 씨(37)는 저축은행, 카드사 등 7군데에 총 2300만 원의 채무를 지고 있었다. 정 심사역은 아파트를 보유한 김 씨가 고액의 채무를 진 이유를 물었다. 김 씨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재차 이유를 묻자 "절대로 사치나 투기 때문에 빚을 진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다 제탓입니다. 남편이 채무 사실을 알기 전에 빨리 갚아버리고 싶어요."

정 심사역은 남편이 알까봐 전전긍긍하는 김 씨에게 "혼자서 끙끙 앓다가는 일이 더 커진다"며 "지금이라도 남편에게 알리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5세짜리 어린 아들과 함께 40대 가장이 창구에 들어섰다. 그는 월수입이 300만 원이나 되는 어엿한 공기업의 직원이었다. 공기업에 계신 분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냐는 질문에 그는 병원비 얘기를 했다. "당뇨로 쓰러진 어머니 병원비도 감당하기 힘든데 지난해 10월에 갑자기 아내와 둘째아이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습니다. 보험사로부터 100% 병원비를 받을 수 없어 어쩔수 없이 돈을 빌리게 됐습니다."

이날 정 심사역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40분을 제외하고 상담한 사람은 모두 17명.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렸지만 방문 상담이 끊임없이 들어와 전화를 받을 여유조차 없었다. 전국 21개 신용회복위원회 지부를 통해 첫날 모두 583명이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밤 10시 반이 돼서야 퇴근한 정 심사역은 "앞으로 1, 2주간은 신청자들이 몰려서 일이 많을 것 같다"며 "일부 '배째라' 식의 나쁜 의도를 갖고 프리워크아웃을 신청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신수정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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